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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일화] 순국열사 반학영선록에 따른 일화

  (1962년 대한민국 전국 공로훈장 단장 수여)충절 반학영(관내시부사)은 1840년(현종6)에 교하면 서패리(돌꼬지)에서 태어나 1910년(순종4) 70평생을 지내는 동안 고종 때 중관내시(中官內侍)로서 봉직하게 되었으나 천성이 강직하고 근실하여 총애를 받아 승전색(承傳色)을 거쳐 내수장 번(內需長番)으로 승격하였다. 순종 때에는 숭록대부지내시부사 (정일품)을 지내 다가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임하고 교하면 서패리 자택에서 은거 하던 중 1910년(경술) 민중전 살해사건에 이어 500년 종사를 일본에게 양여 한일 합병한다는 조서를 전국에 포교하자 비보에 통분을 억제하지 못하여 여러 충신들 과 함께 지하에서 27대 군주를 모시겠다는 일념과 2천만 동포들의 단결에 의지를 받아 명숙죽백 하시기를 복원한다는 요지의 유서(결사계시문)를 써서 몰래 품에 품고 당하리에 사는 숙부인 홍택주(洪澤柱) 지사에게 가서 결고하고 집으로 돌아 오던 중도에서 품었던 글을 삽다리 장터 게시판에 걸고 배를 찔러 순절하면서 내 외관의 관직에 귀천은 비록 다를지라도 군은(君恩)을 수 십년 받았으니 이제 우리 임금이 뜰에 내려섰는데 내 어찌 가히 편안함을 취하여 난방에서 죽으리오 하고 유언을 남긴 후 1910년 8월 2일(계유)사라지니 인근 주민들은 애통해 마지않으며 이는 만고에 충절이라 하고 찬사를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비보를 들은 순 조께서는 이를 가상히 여기고 국장으로 교하면 신촌리 산 75번지에 안장하였다. 그후 이를 추모하는 아래 인사들이 1937년(정축) 6월 비각을 세웠으나 공의 후손 인 관리자(교하면 서패리)양손자 김광현은 형세가 어려워 묘서의 산지를 매각하 고 죽었고 후계자인 김광열 역시 가정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으며 산주 허 욱의 증언에 의하면 1982년 수십명이 와서 돌아보고 보수 관리할 것을 논의하고 다녀간 이후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한다. 1985년 6월 9일 파 주문화원에서 현지 유적지 답사결과 순국지사의 묘소로서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 이어서 안타까운 마음뿐이며 시급한 대책이 요구되는 바이다. 숭록대부지내시부사 반공묘 비명 1937년 6월 일 건립 발기인 통 정 최 봉화(崔鳳和)     통 훈 하 철화(河喆和)     통 훈 이 장현(李章炫)     통 훈 이 시영(李時英) 찬조인 승 록 양 만기(梁萬基)     승 록 나 세환(羅世煥)     승 록 홍 택주(洪宅柱)     승 록 양 준상(楊濬尙)     가 의 최 석두(崔錫斗)     가 선 이 용환(李用煥)     통 훈 이 병직(李秉直)    

질문 [일화] 고려충신 남을진(南乙珍)의 일화

 남을진의 호는 병재(丙齋) 또는 사천(沙川)이며 의령인(宜寧人)으로 지영광군사 천로(知靈光郡事天老)의 아들이요 밀직부사 군보(密直副使 君甫)의 증손이며, 조선조 개국 일등공신 남재(南在)·남은(南誾)의 숙부이다. 1368년(공민왕 17) 전시문과(殿試文科)에 장원급제 하였다. 일찍이 선생은 학문에 뜻을 두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더불어 도의의 교류가 있었으며, 이성계(李成桂)와도 함께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 동안의 관력(官歷)은 고려사에 모두 빠지고 없어서 알 수가 없고 다만 간성왕(杆城王)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를 역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선생은 고려말 정치가 문란해지자 장차 군사혁명으로 국가가 망함을 통단하여 난국을 부조(扶助)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친족들에게 장차 결별(訣別)을 미리 고하고 친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차마 국가의 망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기에 차라리 시골로 돌아가 밭이나 갈겠소.”하고 양주 고사천(古沙川) 봉황산(鳳凰山) 아래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선생은 여말선초(麗末蘚初)에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이 치악산(雉岳山) 정상에다 제단(祭壇)을 쌓고 고려의 종사(宗社)를 잇(繼)게 하고자 변혁사(變革祀)를 지낸데 이어 동지들과 더불어 종참(從參)하였다. 그 자세한 기록은 원천석전(元天錫傳)에 있다. 이윽고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자 선생의 조카 남재(南在)에게 어찰(御札)을 부쳐 고구(故舊)의 예로써 초빙하였으나 곧 선생은 조카에게 이르기를, “부자형제가 각각 뜻이 같지 않는 것. 너는 비록 새 임금의 으뜸가는 공신이 되었으나 나는 어찌 두 임금을 섬기는 신하가 되겠느냐.”하며 마침내 죽기를 맹세하고 누운 채 거절하였다. 그 조카가 울면서 고하기를 “주(周)나라 은(殷)나라의 정난(靖亂)때 10철(哲)은 모두 현인(賢人).... 운운하니 선생이 머리를 풀어 얼굴을 가리고 반쯤 누워서 이르기를, “이제(夷齊)는 어떠하리 천일(天日)이 위에 있도다 이 마음은 바꿀 수 없다.”고 하니 그 조카가 실망하고 인사하고 돌아오면서 탄식하는 시를 지으니, 「서산(西山)의 절의는 태산처럼 무겁도다. 공(公)은 정포은(鄭圃隱)과 더불어 이 이치를 알았네.(의정(議政)의 왕도(王道)를 소중히 하고 패도(覇道)를 배척하는 선비정신을 말한) 어찰(御札)로도 금석같은 지조를 돌이키기 어려우니 고상한 품격 감악산 굴에 사무치도다」 〈西山節義奉山重 公興達何知此理 御札難回金石操 淸風凜凜 紺嶽裡〉라 하였다. 남재(南在)가 돌아가서 이태조(李太祖)에게 아뢰는데 영상 조준(領相趙逡)이 곁에 있다가 아뢰기를, “남을진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니 그 지조를 빼앗기 어렵습니다. 원컨대 뜻대로 살도록 하십시오.”하였다. 이태조도 그 불굴의 절의를 알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 사람의 충절은 실로 가상하다. 둔거(遯居)한 땅으로 인하여 표창함이 마땅하다.”하고 사천백(沙川伯)에 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 봉작(封爵)을 끝내 받지 않고 “내가 깊은 산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이같은 소명(召命)이 있었다.”고 말하고 드디어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감악산 굴속으로 들어가 목숨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대개 머리를 산발한 것은 기자(箕子)의 미치광이 노릇을 뜻하고, 입산한 것은 이제(夷齊)의 은거(隱居)를 본받은 것이다. 굴속에서 눈으로 해를 보지 않고 발로 굴밖을 밟지 않으니 종신토록 사람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별세하니 산중 사람이 그 마을을 이름하여 「남선굴:南仙窟」이라 하고 굴속에 편석(片石)을 세워 앞에는 유상(遺像)을 적게 각(刻)하고 그 위에 「입산이효 백이지절(入山而效伯夷之節) 피발이모 기자지광(被髮而慕箕子之狂)이라는 글을 달았다. 굴속 암벽에 선생이 석각한 유시(遺詩)가 있어 이르기를 「법문(法門)에 홀로 선 성군(聖君)은 늙었으나 바른 덕 한결같이 지킨 대도(大道)가 높다. 작제왕(作帝王)의 산은 만고에 있는데 이(李)가가 개국하여 등신(等身)을 세웠네.」 〈玄門獨立老聖君 守中拘一大道尊 作帝王山萬古存 木字開基建等身〉일찍이 선생이 건천 정광(巾川程廣)에게 부친 시가 있어 이르기를, 「옛 친우가 옛 친우를 알지니 몇 번이나 소리내어 글을 읽었소. 많고 적은 관심사는 오직 가을 바람에 소나무 그림자 움직이는 것이라오.」 〈故人知故人 幾度讀者音 多少關心事 秋風動松陰〉 《成仁錄》과 또 언문(諺文)으로 된 유훈(遺訓)이 적성읍지(積城邑誌)에 전하기를, 「등불 빛의 반짝임이 있고 없음에 따라 생명이 죽고 사는 여부(與否)를 징험(徵驗)하느니라.」 선생이 별세하자 흰구름이 조상(弔喪)하듯이 3일간 에워쌓고 흩어지지 아니했으며, 염을 한 시신이 굴 밖으로 나온 저녁에는 태풍이 문득 일어나 굴속에 있던 선생의 기록한 종이가 편편이 날아갔다고 전한다. 1712년(숙종 38) 임간서원에 조견과 함께 제향하고 1724년에 정절사(旌節祠)라 사액(賜額)하였다.(景賢祠誌) 또 영조(英祖)때 사천서원(沙川書院)에 타령(妥靈)하고 1932년 개성 두문동 서원(杜門洞書院)과 장성 경현사(景賢祠)에 각각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질문[일화] 하늘이 낸 효자에 얽힌 일화

 옛날 교하현 휴율리(현 하지석리)에서 광해군 4년(1612)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여 주이씨 이 숙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7세에 효경을 배우고 11세 때 사 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다. 그러나 인조대왕 당시 아버지(德洪)가 예빈서 참 봉(禮賓署參奉)이 되어 벼슬길에 오르자 한양 북장동 사가리(漢陽 北壯洞 四街里) 로 이사하였는데 인근에 살던 채궤강은 이 숙의 놀라운 재주에 감탄하여 자기 딸 과 인연을 맺게 하였다. 그 후 아버지께서 상서원 직장(尙書院直長)으로 있을 때 갑자기 세상을 뜨시니 슬피 통곡하며 현 법원읍 갈곡리 선영하에 안장 시묘살이 를 하면서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살았다. 가세가 빈약함에도 벼슬을 마다하 고 학문에 열중 항상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조석문안과 정성을 기울여 따뜻한 봉 양을 게을리 하지 않은 이 숙은 굶주리며 헐벗은 이웃 사람들을 위하여 적극 헌신 봉사하는 등 많은 인정을 베푸니 모든 사람들은 보기드문 효자로서 이웃을 사랑 하는 의인이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60여 세에 이르러 시난고 난 위중한 병환이 일자 사면으로 다니며 여러 가지 좋다는 약을 구하여 정성껏 복 용케 하였으나 차도가 없어 유명한 의원에게 진맥을 보이니 허약한 증세로서 백 약이 무효이며 혹시 산삼이나 구하여 드리면 어떨는지! 하였다. 그리하여 정신없 이 집을 떠나 수주일을 두고 선산이 있는 근처 감악산을 비롯하여 파평산 중령 일 대 골짜기를 헤매어 다니던 중 어느 여름 삼복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두루 살피 다가 기진맥진하여 바위에 주저앉아 한탄하며 자기도 모르는 순간 잠이 들었다. 이때 별안간 공중에서 큰소리로 친환이 위중한데 잠만 자느냐하고 고함을 치며 자기 이름을 불러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상한 풀에 붉은 열매가 있어 자세히 보니 삼지구엽(三枝九葉)이라 열매를 따서 맛 을 보니 향미가 좋고 삼맛같아 이를 정성드려 캐보니 수십년 묵은 산삼이 틀림없 는지라 기뻐하며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병이 위중하여 돌아가실 것만 같아 즉시 이를 달여 드리니 잠을 주무신 후 차차 쾌차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잉어를 잡수시겠다 하여 고향 근처인 한강을 통하는 휴율강 앝은 냇물에 버드 나무 가지가 늘어진 곳을 살피니 잉어 한 마리가 있어 이를 붙잡아 기쁨을 이기지 못해 집으로 급히 와서 끓이고 회를 만들어드렸다. 의원에게 이러한 사연을 말하니 의원하는 말이 구하기 어려운 산삼과 잉어를 얻었으니 옛날 중국 땅에 살던 왕상(王詳) 과 같도다 하며 칭찬을 하였다 한다. 또한 엄동설한 병환이 위중하여 음식을 전폐 하면서 앵두를 잡수셨으면 하시기에 화분을 가꾸는 사람을 찾아가 자세히 보니 3 개의 앵두가 열린 화분이 있는지라 그리하여 많은 돈을 주고 화분째 사다드렸더 니 기뻐하시는 말씀이 앵두는 아들의 효성이 지극한 것이라며 한알만 따서 잡수 시고 나머지 두 알은 그냥 곁에 두었다. 화분에 앵두 두알을 보고간 의원은 어의로 있는 김별제(金別提)에게 이러한 사연을 전달하여 당시 현종대왕(顯宗大王)에게 이 숙이란 사람이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는 전후사연을 말하니 전에도 보 지못한 효자라 찬탄하시고 현종 2년(1661) 2월 효자로 정려(旌閭) 효자문을 세웠 다. 그 후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는 오래도록 사시다가 86세 때 돌아가시니 슬피 통곡하며 3년간 시묘살이를 마치고 내려와 법원읍 갈곡리 산골짜기 선영하로 이 주한 후 현종 10년(1669) 5월 17일 돌아가시니 선영하에 안장하였으며 경종 2년 (1722)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자손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으나 효자문 은 증손이 현재 살고 있는 홍천군 남면 제곡리(洪川郡南面諸谷里)에 옮겨져 지방 문화재로 수호되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 살던 한성부 북장동 사가리(漢城府北壯 洞四街里)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효자문 사거리라 부르고 있다하며 효자동으로 개 칭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질문[일화] 의병장 임꺽정(林巨正)의 일화

 조선조 양주 백석면 산골짜기 어려운 가정에 태어난 임꺽정은 임계의 자식으로서 자(字)는 맹견(孟堅) 호(號)는 월창(月滄)이며 나주 임씨(羅州 林氏)이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학문에 뛰어나 천문, 지리, 산수, 율여, 복술(天文, 地理, 算數, 律呂, 卜術)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으며 무술(武術)에도 신출귀몰한 용장이었다. 그러나 천민이 되어 벼슬을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두루 돌아다니며 방황을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때 공신을 세운 원두표(元斗杓)를 도와 공을 세우고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즉시 사퇴한후 인조2년(1623)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조행립(曺行立)과 함께 의병을 규합 진압하였으며 또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조행립, 임기영(林起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감악산(紺嶽山)을 거점으로 북한산, 보개산, 고령산 등지를 비롯하여 임진강을 오르내리며 10만의 청군들과 맹렬한 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던 인조대왕이 부득이 12월 혹한 속에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형제지의에 예(禮)를 갖추고 화의(和議)하자 입양 영암(靈巖)에 은거하였다. 임꺽정은 세상을 원망 방랑세월을 하면서 어수선한 나라 걱정을 많이 하여 임꺽정이라 하였다 하며 우리고장 감악산 정상아래 임꺽정이 은신하였었다는 석굴(石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질문[일화] 반석(磐石)나루에 얽힌 일화

 반석나루(磐石津)는 옛날 한강하류에 위치한 교하면 신촌리 지역 강변에 안방같 은 큰 바위가 깔려 있다고 하여 이러한 명칭이 붙여져 내려오고 있다. 이 나루아래 임진강은 송도에서 내려오는 사천강과 합류, 한강과 마주치는 삼도품에서 개풍, 김포, 강화를 거쳐 서해로 왕래하는 상선배들이 간만에 물때를 맞추기 위하여 쉬 어 가는 주요한 나루로 수운의 요충지이다. 그리하여 선인(船人)들의 안식처로 기 분풀이를 조성하고 많은 돈이 오고 가고 하던 이곳엔 많은 주막과 시장이 번창하 였으며 상도의와 상술, 정보를 교환하던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38선이 가로막혀 수운의 요충지였던 이곳은 불행히도 왕래를 못하는 군사통제구역이 되 어 버렸다.   

질문[일화] 여류시인 황진이 실기 유적의 일화

황진이(黃眞伊)라 하면 송도삼절(松都三絶〓徐花澤 朴淵 黃眞伊)의 하나로서 조선왕조 오백년 간의 대표적 명기(名妓)임은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물이 천하절색일 뿐 아니라 문필이 또한 절등하였었다. 꽃다운 나이에 이르매 그의 아리따운 소문이 국내에 자자하니 누구나 그를 한번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에도 이웃에 사는 청년이 누구보다도 더욱 황진이를 연모하여 주야로 한번 만나보려고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했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내외법이 극히 엄격 하였으며 특히 황진사집은 개성에서 원래 문벌이 당당한 명문가였기 때문에 비록 사생녀인 황진이라도 외간 남자로서는 도저히 그 문호도 엿 볼 기회를 얻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청년은 다만 혼자 심화만 태우다가 결국 그것을 빌미로 병이 들어 가련한 청춘에 천고의 한을 품고 영원한 나라로 가고 말았다. 그 청년의 집에서는 울며 애통을 하고 초종 범백을 치른 다음에 북망산으로 매장을 하러 가게 되었다. 상여꾼들은 그의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추어 “우워남짜 우워호 이제가면 언제 오나 워워남짜 우위호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밖이 저승일세 우워남짜 우워호” 하며 슬픈 선로가를 불렀다. 상여꾼들이 그 청년의 집을 떠나 북망산으로 향하다가 상여가 마침 황진이의 집 문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상여꾼의 발이 땅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아 꼼짝달싹을 못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여 이것이 대체 무슨 까닭이냐 하고 한참 소란하게 떠들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던 차에 마침 어떤 사람이 황진이를 보고 그 청년의 죽은 사정과 또 상여꾼의 발이 땅에 붙고 떨어지지 않아 꼼짝달싹을 못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여 이것이 대체 무슨 까닭이냐 하고 한참 소란하게 떠들며 어찌할줄을 몰랐다. 그러던 차에 마침 어떤 사람이 황진이를 보고 그청년의 죽은 사정과 또 상여군의 발이 땅에 붙고 떨어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황진이는 크게 감동하여 ‘내가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남을 살리는 좋은 일은 못할지언정 나로 인하여 남의 집 아까운 청년이 죽음에까지 이르렀다면 그 아니 가여운 일이며 난들 어찌 죄악을 면할 수 있으랴. 또한 이후에도 나의 미색으로 인하여 병들어 죽을 사람이 또 몇몇이 있을지알수 없으니 그까짓 구구하게 정조니 문벌이니 볼 것도 없이 차라리 아주 해방의 생활을 하여 여러 사람을 위안도 시키고 나도 이 세상에서 마음껏 놀다가 죽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는 대담스럽게 자기 부모에게 그 사정을 자세히 말하고 소복단장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청년의 시체를 끌어안고 어루만지니 그제서야 그 상여꾼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서 무사히 장례를 지내게 되었다. 황진이는 그날로 바로 그 부모에게 죽기로 맹서하고 기생이 되었다. 그는 원래 천재가 비상한 까닭에 기생이 된지 불과 며칠만에 노래와 춤이며 그와의 모든 음악에 다 능통하게되니 그의 방명이 일시에 천하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때에 유수송모(留守宋某) 는 또한 풍류 남자로 화류장의 백전 노장이었다. 진랑을 한번 보고는 과연 명불허전이라 하고 극히 사랑하고 관대하였다. 그는 평안도의 명기라 문틈으로 진랑을 엿보고 놀란 생각을 하면서 이 세상에 어찌 이러한 미인이 있으리요, 유수(留守)가 만일 저러한 여자를 사랑하면 내 일은 다 낭패가 되리라 하고 머리를 풀고 맨발로 뛰어 나아가 야료를 치니 유수가 놀라 일어나고 다른 좌객들도 또한 피하여 달아났었다 그 뒤에 유수는 그의 대부인 환갑잔치를 하는데 경향의 명기 명창이 한곳에 다 모이고 인근의 수령방백(守令方伯)이 모두 참여하였다. 다른 기생들은 모두 갖은 호사와 화장을 할대로 다하고 저마다 자기가 제일 잘난 명기 노릇을 하려고 애들을 썼으나 유독 진랑은 단장도 호사도 아무것도 아니하고 수수하게 차린 의복에다 본 얼굴 그대로 참석을 하니 천연한 그 아리따운 태도가 만좌를 경동시켜 누구나 진랑만 바라보았다. 더욱이 옥을 굴리는 듯한 그 청아한 목소리로 공중이 떠나가게 노래를 부를 때에는 그야말로 요지의 왕모(搖地王母)가 백운요(白雲謠)를 부르는 듯, 계궁의 항아가 월광곡을 부르는 듯, 선녀인지 자못 정신이 황홀하여 마취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그 회석에 참가하였던 악공의 엄수(樂工嚴守)라 이는 七十의 노령으로 가야금이 전국 중 명수요, 그 외 일반 음률에도 모두 능통하였는데 처음으로 진랑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 를 자기가 오십여년간을 화류장에서 놀았으나 이러한 미인을 처음 보았다 하고 선녀 (仙女)라고 부르더니 급기야 진랑의 노래를 듣고는 또 놀라 일어나 말하되 이것은 분명히 선계의 여운(仙界餘韻)이요 인간의 속조는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이 몇가지의 일만 보아도 진랑의 인물이 어떠한지, 노래가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진랑은 조선에서만 이름이 났을 뿐 아니라 중국에까지도 소문이 높아서 당시 명나라 사신(明使) 이 와서 조선의 사정을 물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랑의 소식을 물었다. 한번은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는 길에 개성에 잠깐 들렸었는데 구경하는 남녀가 길가에 잔뜩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진랑이 그 중에 섞여 있었다. 명시(明使)가 멀리서 진랑을 바라보고 통역더러 말하되 천하절색은 조선에 와서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고 한다.◇ ◇ 황진이는 비록 기적(妓籍)에 이름을 두었으나 원래 천성이 고결한 까닭에 보통의 속류 기생들과 같이 사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관부 연회석같은 데를 가도 결코 새옷을 갈아입거나 특별한 화장을 하지 않고 자기 평소에 입던 의복 그대로 가며, 시정의 무식 천류배와는 결코 같이 놀지를 않고 항상 명사문객과 서로 어울리며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특히 당시(唐詩)를 애독하였다.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 (禪僧)이 있었으니, 학자는 곧 화담 서경덕(花潭徐敬德)선생이요, 선승은 지족암 (智足庵)에서 三十년동안을 면벽참선(面壁參禪)한 만석선사(晩釋禪師 或云安釋)이었다. 만석은 자칭 도학이 화담선생 이상이라고 하는 터이었다. 황진이는 평소에 두사람을 다 흠모하던 중 한번은 그 인물의 됨됨이를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조금도 난색이 없이 승낙하였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 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또한 허락하였다. 그렇게 수년동안을 한방에서 동거하는 중에 황진이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선생을 유혹시키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목불(木佛)과 같이 조금도 동심을 하지 않고 담연자약하니 황진이는 크게 탄복하여 다시 절하며 말하되 선생은 참으로 천하 대성인(大聖人)이라 하고 그 뒤에는 다시 다른 뜻을 두지 않고 더욱 선생을 경모하여 항상 말하되 개성에는 박연폭포(朴淵瀑布)와 서선생(徐先生)과 자기등 삼절이 있다고 하였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서화담을 한번 시험하여 본 뒤에 다시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시험하여 보려고 지족암을 찾아가서 자기가 제자가 되어 수도하기를 청하니 지족선사는 여자는 원래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처음부터 절대 거절을 하였다. 황진이는 그 선사의 태도가 너무도 냉정하여 말도 부치기가 어려워 혼자 말로 「오냐 어디 보자 평소에 새침데기 골로 빠진다고, 네가 아무리 도도한 척을 하여도 나의 묘계에 한번 빠져보리라.....」하고 돌아와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 단장으로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가서 그 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다 침소를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간 불공을 한다고 가칭하며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하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원문(祝願文)을 지어서 청아한 그 좋은 목청으로 처량하게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와도 같고 선녀의 음률과도 같아서 아무 감각이 없는 석불이라도 놀랄만 하거늘 하물며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감히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을까 보냐. 이와 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축원을 하니 노선사가 처음에는 무심하게 들었으나 하루 이틀 들을수록 자연히 마음에 감동이 생겨서 그 三十년 동안이나 잔뜩 감고 옆에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번쩍 떠서 황진이의 태도를 한번보고 두 번 보니 보면 볼수록 선계의 정념(禪界淨念)은 점점 없어지고 사바의 욕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불과 며칠에 황진이와 서로 말을 붙이게 되니 황진이는 예의 그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으로 그 선사를 마음대로 놀리어서 최후에는 그만 파계 (破戒)를 하게 되니 지금가지 세상에서 쓰는 「망석중 놀리듯 한다」는 말이라든지 「십년공부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 사실을 일러서 하는 말이요, 속간에서 흥행하는 망석중 노름이라 하는 것도 또한 그 사실을 실연(實演)하는 것이다.◇ ◇ 황진이는 그와 같이 인물이 비범하니 만큼 다른 여자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을 많이 하였으니 그 중에도 큰 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유람을 특히 한 것이다. 그는 강원도 금강산(江原道金剛山)이 천하의 제일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유람할 생각을 두었으나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여의하게 못가더니, 때에 마침 서울서 이씨(李氏)란 청년(靑年)이 개성으로 놀러왔는데, 그는 어떤 재상의 아들로 위인이 청수호탕하고 또한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진랑은 그 사람을 보고 조용히 말하되 내가 듣건대 중국사람들도 원생고려국하여 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이라 하고 누구나 금강산 구경하기를 원한다하니 더구나 우리 조선 사람으로 자기 나라에 있는 금강산을 못본다면 그것이 어찌 수치가 아니리요,내가 우연히 당신을 만나뵈니 가히 동무하여 유람을 갈만하다 하고 두 사람이 서로 악수한 뒤에 하인이나 일반행구는 다 제폐하고 황진이는 죽장망혜에 굵은 삼베치마와 저고리를 걸쳐 입고 이씨도 표의초립으로 양식을 친히 짊어지고 산정수로(山程水路) 몇백리를 도보하여내외금강의 만이천봉과 장안(長安), 유점 신계(神溪)등 고사명찰을 모조리 찾아 구경하니 그 운치야 물론 범용한 사람으로 감히 맛볼 수 없는 것이지만 고생인들 여간 하였으랴. 노자가 떨어져서 기갈이 심한 중에 노독까지 나고보니 초라한 형용은 가히 무부구시용 (無復舊時容)이라 할 만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호사다마(好事多魔)로 중도에서 두 사람이 서로 종적을 잃게 되니 황진이는 천신만고를 다하여 이씨를 찾았으나 역시 종적이 묘연하므로 할 수 없이 걸식을 하여가며 내친걸음에 경상도 태백산 (慶尙道太白山)과 전라도 지리산(全羅道智異山)까지 두루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주에 이르니 때는 마침 나주 목사(牧使) 가 무슨 연회를 하는데 인근 각군의 명기 명창이 한곳에 모여 질탕하게 놀고 있는 중이었다. 진랑은 그 소식을 듣고 폐의파상(廢衣破裳)의 초라한 행색으로 회석에 돌입하니 만좌가 모두 그를 광인이나 걸인으로 알고 대경대괴하였다. 그러나 보옥은 아무리 진흙속에 묻혀 있어도 광채가 있는 격으로 진랑은 비록 그렇게 걸인의 행식을 하고 갔을지라도 원래에 골상이 비범한 까닭에 목사도 한번보고 또한 범인이 아닌 것 을 짐작하고 좌석을 허락하였다. 진랑은 한손으로 헌옷에 있는 이를 잡으며 목청껏 한곡 놓으니 그 노래 소리가 멀리 공중을 통하고 고저 장단이 모두 절조에 부합하여 그 좌석에 있는 소위 명기명창이라도 감히 따르지 못할 만하게 하니 만좌도 모두 괄목경탄하고 특히 우대를 하였다. ◇ ◇ 그때에 선전관 이사종(宣傳官李士宗)은 풍류호객으로 노래가 천하 절창이었다. 평소에 황진이의 예명을 익히 듣고 한번 같이 놀아보려고 일부러 개성까지 갔었는데 황진이의 집에는 직접 가지 않고 그의 집 근처 천수원(天壽院)천변가에 말을 매고 백사장에 드러누워 두어 곡조의 노래를 부르니 진랑이 풍편에 잠깐 듣고 놀라며 말하되 이 노래의 곡조는 시골 촌부의 능히 할바가 아니요, 필경 어떤 명창의 노래인데, 내가 듣건대 서울의 풍류 남자 이사종이 당대 절창이라 하더니 아마 그 사람이 이곳에 놀러 온가 보다 하고 사람을 보내 탐문하니 그는 과연 이사종이었다. 황진이는 즉시 이씨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수일을 같이 노는데 자연 지기가 서로 합하니 피차에 육년간을 같이 살기로 약속하되,먼저 삼년간은 자기가 일체 생활비를 담당하여 살고 뒤의 삼년은 이씨가 일체 생활비를 담당하여 살기로 하고 황진이가 먼저 자기가 가진 집물을 전부 팔아가지고 이씨 집에 가서 삼년간 이씨 돈은 한푼 쓰지 않고 자력으로 살았다. 삼년 후에는 이씨가 또한 살림을 하게 되어 먼저날에 황진이가 자기에게 하던 것과 똑같이 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재미스런 행복한 생활을 부러워하였다. 그와 같이 삼년을 또 살다가 약속한 육년이 만기가 되는 황진이는 그 약속대로 이씨를 작별하고 표연히 고향으로 내려가니 이씨가 비록 섭섭하기 짝이 없으나 또한 어찌 하지 못하고 그냥 헤어졌다. 이런 사실은 황진이와 같은 여류 기인이 아니고는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    

질문[일화] 덕암산 가재골의 채동지(蔡同志)의 일화

 조리면 덕암산 아래 가재골에 옛날 떠돌이 신세 채동지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구 척장신으로 뚝심이 많고 힘이 센 장사로서 미련하기가 소같은 성품이며 한 끼에 한 말의 쌀을 먹어야 한다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처자식도 없고 재산과 집도 없 어 여러 동리를 다니면서 걸식을 하며 힘든 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다가 가재골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움풀이를 하고 살고 있었다 한다. 힘이 워낙 세고 미련하 여 사람들이 밧줄로 머리를 동여매고 가운데다가 쐐기를 틀어 넣어 비틀어도 심지 어 인두로 지져도 화를 내는 일이 없으며 아픈 표정없이 손으로 슬그머니 밀어 제 치며 웃어 버리는 위인이었다. 그리하여 인근 사람들은 춘하추동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덕암산 기슭 가재골에서 살다가 소식없이 사라진 채동지를 정체를 알 수 없 는 도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겨울에 눈이 올 때면 채동지가 살고 있던 주위는 눈이 내리는 즉시 녹아 없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지역 조리면 오산리(梧山 里)명골에서는 지금도 산신제(山神祭)를 지내고 있는데 이 곳 산신은 특히 영험하 여, 어느 날 백정 한 사람이 망태기 속에 산신제에 쓸 고기를 훔쳐 넣는 발이 떨어 지지 않아 도망할 수가 없어서 가진 애를 쓰다가 훔친 고기를 놓으니 발이 저절로 떨어졌다고 한다. 또 나무꾼이 이 산신당 근처에서 나무를 해 가지고 가려고 하는 데 역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갖은 고생 끝에 그 나무를 내려놓았더니 발이 그제 서야 떨어졌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일화] 장단대신 李宗城의 일화

 유척기(兪拓基)는 숙종 17년(1691)에 태어나 숙종 40년 증광문과 병과급제 검렬, 정언을 거쳐 이조참의, 도승지, 양주목사, 함경,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이어 1739년 우의정, 1758년 영의정이 되었고 1760년 영중추부사,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가 있던 당대 명필이며 유명한 재상으로 영조 43년에 죽으니 문익(文翼)의 시호를 받은 사람이다. 정언으로 있을 때 경종 1년(1721) 세제(世弟)영조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숙종 37년(1711) 사마사를 거쳐 장단 오목이(장단군 군내면 읍내리)에 거주하면서 공부만을 하고 있던 이종성(李宗城)의 집 근처에 이르러 고개를 넘으려 하였으나 7일 동안을 가도 그 자리를 맴돌게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연유를 몰라 곰곰히 생각 끝에 동리사람에게 이 지방에 명인을 물으니 백사 이항복의 5대손이신 이종성(후오천대신)이란 분이 사는게 이분은 지략과 도량이 넓으며 장래의 성쇠와 길흉을 점치는 신출귀몰한 유명한 재주를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찾아가서 사죄를 하고 자초지정을 간청하니 “그대 공이 청나라에 가게되면 천자께서 쌀 1,000석을 보내라고 할 것이니 우리나라에서는 수년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하라.” 는 부탁을 하려고 그리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하직을 하고 떠나가는데 웬일인지 순식간에 청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도착하여 영조(英祖)책봉에 주청드리는 자리에서 천자께서는 이종성이 말한대로 과연 1,000석을 보내줄 것을 하명하자 우리나라의 곤궁한 실정에 대하여 자초지종을 상세히 상주하니 고개만을 끄덕이니 할 수 없어하며 요행이 사면하게 되어 무사히 돌아오는 길에 이종성을 예방 치하를 드린 후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한다. 이후 이 고개를 가칠일고개(加七日嶺)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맑고 맑은 오목내(梧川)가 흐르고 있어 이종성은 오천대신으로 불려졌다. 오천대신 이종성에 얽힌 일화는 많다. 이종성이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가 되어 낙향 낚시와 시희로 소일을 하던 중 집안이 가난해 말을 타지 못하고 단신이 걸어서 황해도 봉산고을 사또로 부임차 이 지역을 지나던 김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오목내를 건너서 건너가려할 때 건너쪽 언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이 있어 “여보 영감” “미안하지만 나를 업어 강을 건너줄 수 있겠는가?” 하고 간청하니 서슴치 않고 “예” 하며 발을 걷어부치고 장등이에 업고 개울을 건너가는데 반쯤 가다가 김사또가 하는 말이 “이 근처 오천대신이 살고 계시다는데 알고 있느냐”며“무엇으로 소일을 하고 계시느냐” 고 물으니 “예” 대답하기를 “그 분은 낚시를 하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원천이나 하고 지낸다.” 하 니 깜짝 놀라며 기절초풍 개울 한가운데로 자빠졌다 한다. 이리하여 오천대신은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 입히게 하고 깡보리밥을 같이 하면서 황해도 봉산은 인심이 좋은 고장이니 아무쪼록 선정을 베풀어야 된다는 간곡한 부탁을 하니 대감의 말씀에 한치라도 소홀함이 없이 하겠다면서 공손히 하직 3년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질문[유래] 파주(坡州)로 개칭한 유래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1417∼1468)은 세종의 2남 문종의 아우. 어머니는 소헌왕후 청송심씨이고 할머니는 원경왕후 여홍민씨이며 비(妃)는 파평윤씨 윤번의 딸 정희왕후이다.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에 봉해지고 단종이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한명회와 권람의 모의로 세조는 왕위를 빼앗기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여, 단종의 중신이었던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죽이고, 왕위 경쟁자로 지목된 아우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에 유배 군국대권을 장악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 육종영(六宗英) 육절신(六節臣)등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영월에 유배사사 하는 등 계유정난을 일으켜 1455년(단종2년) 왕위에 즉위하였다. 1459년(세조4)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정변으로 즉위할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조비 파평윤씨, 정희왕후의 고향을 승격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원평도호부(原平都護府)를 목(牧)으로 승격하는데 있어 파평윤씨의 파(坡)자와 주(州)자를 따서 파주(坡州)로 개칭하였다고 유래되었으며 또한 할머니 태종비 역시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하여 여홍민씨에 고향인 여흥(驪興)도 또한 여주(驪州)로 동시 승격하였다 한다.조선조 개국한 이성계 태조대왕은 태조 3년 8월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하고 정도전(鄭道傳)과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궁월인 경복궁을 건립하고 사직을 봉안하는 종묘 27간반을 건립 창엽문(蒼葉門)이란 현판을 설치한 것은 이미 조선조는 28왕 28세로 끝이 난다는 예측을 한것이라 하며, 태조 3년(1394) 10월 한양으로 천도후 욕망에 불탄 태종과 세조대왕의 왕권 다툼으로 모의를 계획 형제와 종친을 위시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것도 세상만사 우리나라 운세이며 이 세상에 타고난 개별적 인생의 운명이 아닌가 사료되는 바이다.    

질문[유래] 임진강(臨津江)으로 개칭한 유래

  우리나라 한반도 허리를 동서로 가로질러 함경도 마식령 발상 안변과 삭영, 만전땅을 거쳐 흐르는 임진강은 연천과 동두천 포천에 모인 물은 한탄강이 되고 도간포에서 합류 교하 삼도품에서 한강과 합류 조강이 되어 서해바다로 이은 강물줄기는 약 700리(274km)에 달한 기나긴 젖줄이라 하겠다. 이러한 가운데 고구려때 당군(唐軍) 주둔 당시 표로하(瓢蘆河)로 호칭되었으나 고려말 공양왕이 왕조신주(王朝神主)를 돌배에 모시고 도망갈 당시 도감포 아래 연못에 수장되었다 하여 구연강(仇淵江) 또는 신지강(神智江) 낙하(洛河)등으로 개칭하면서 내려온 이 江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군 가등청정(加藤淸正) 총독이 이끄는 40만 대군이 부산을 상륙 3파로 나누어 한양으로 상경하는 주력부대와 충주에서 방어하던 신립(申砬)장군과 격전 끝에 패전을 거듭하게 되자 신립이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들은 선조대왕은 조정중신들과 공론 끝에 의주로 파천하기로 하고 29일 오후 불야살야 호종원을 데리고 한양을 출발 고양 벽제관에서 유숙 4월30일 아침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행군 혜음령을 지나 분수원 신탄막(新炭幕)에 이르러이엉으로 지붕을 둘러싸인 천막을 설치 새로 만든 탄불에 비맞은 옷을 말리며 점심을 한 후 출발 파주목관사에서 저녁을 먹고 나니 전령이 급히 달려와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어가행군 일행은임진강을 밤중이라도 건너야하겠다는 각오로 비가 오는 가운데 동파나루에 당도하니 깜깜한 그믐날밤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풍우속에 건너갈 길이 막연하여 호종하던 중신들이 수시간에 걸쳐 공론이 분분한 가운데 밤 12시에 이르러 율곡선생이 화석정에서 옛날 제자들을 지도할 당시 밀 한쪽씩을 가져오라 하여 화석정 도리, 기둥, 석가래, 마루에 기름칠을 했다는 말을 들은 백사 이항복이 강변에 있는 화석정에 불을 사르니 화광이 충천한 가운데 폭풍우에 불어나는 홍수, 나룻배는 뒤집 힐듯하면서 간신히 어가행군 일행이 강을 건너 한숨을 쉬며 하늘을 우러러 통곡 동파역에 이르러 밤을 세우고 송도에 당도 명나라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면서 평양을 거쳐 의주로 파천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왜군은 5월 5일 신지강에 당도 아군과 17일간에 걸쳐 격전하였으나 유극량 장군과 수어사 신길(申 )이 전사하니 삽시간에 왜군들은 신지강을 도강 송도 평양성에 진주하였다. 선조 26년 3월 명장 이여송이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아군과 합세 평양성을 탈환 임진강변에 진을 구축 방어하는 동안 이순신장군이 일본수군을 격파하는 한편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자 왜군 잔여병들은 할 수 없이 한양을 버리고 부산으로 퇴하니 선조 27년(1593) 10월 선조대왕은 환도할 때 이 강에 당도하여 국가민족을 위하여 순국한 장병들의 영혼의 넋을 달래고자 나루터 강변 모래사장에 제물을 차려놓고 놓고 위령제를 지내면서 의주 파천당시 4월 그믐밤 폭풍우속 노심초사 고생 끝에 이 나루를 건너게 된 쓰라린 아픔과 이 강을 지키고져 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용감한 충신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가운데 선조대왕께서는 통곡하며 그래도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天佑神助)이 나루를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였다하여 신지강(神智江)이 임진강(臨津江)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선조 32년(1598) 8월 일본 풍신수길(豊臣秀吉)제독이 죽으니 일본군의 철군으로 7년만의 임진왜란이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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