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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유래] 율곡과 매월당의 천재적인 대학자의 유래

흙룡이 동해바다에서 침실로 들어와 신사임당 품에 안긴 태몽을 꾸고 탄생하신 율곡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어머니의 지도를 받아 3살때 시를 지었으며 7세에 사서제경(四書諸經)을 통달 화석정 8세 명시로 명성이 높았다. 13세때 진사시 장원을 거쳐 19세에 금강산에서 잠시 입산 수도하다 강원도 소금강산에 들어 35세가 많은 퇴계선생을 예방 이기설을 논하고 생원시, 별원시, 명경과시, 문과, 병과, 광시, 정시, 복시등 구도장원(九度壯元)을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학교를 설립 교화하고 구휼과 군정을 개혁하였으며 대제학, 이조판서를 역임 병조판서로서 임진왜란이 날줄알고 10만의 양병소청과 동인 김효원과 서인 심의겸간에 분당을 막고 퇴관할 때마다 고향인 자운서원과 화석정, 석담 등지에서 수많은 수제자를 양성하였다. 선조 17년 이조판서에 재임 박근원 등의 죄를 청환하다 49세로 돌아가시니 영의정에 중직과 문성에 시호를 내린 대학자이시다. 매월당 김시습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질이 총명하여 3세때 시에 능숙하고 5세에 대학을 통달 신동으로 널리 알려지니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경탄하고 김시습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며 13세 사서삼경과 경학에 전통하였으며 명성이 높은 윤상 선생에게 제자 백과를 배웠다. 1455년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3일이나 통곡 비정한 정치를 비관 책을 모두 불사르고 중이되어 양주, 수락산을 비롯하여 설악, 금오산 등지로 두루 방랑 세상이 허무함을 노래 부르며 세조를 호통하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안장하였다는 용감한 걸출 학자이다. 세조 4년 탐유관동록후지를 편찬한 후 수많은 책자를 저술하다가 홍산 무량사에서 죽으니 부도를 세웠다하며 숙종때에 집의에 이어 이조판서로 추증 생육신으로 영월 육신사에 배향하였다. ◇ 율곡 이이(栗谷李珥) ◇ <외가댁 3세 명시〉石榴皮裏碎紅珠 : 석류나무 잎 사이에 붉은 구슬이 매달렸네 <화석정 8세 명시〉 林亭秋己晩 : 야유하는 나그네 뜻은 무궁하며 騷客意無窮 : 야유하는 나그네 뜻은 무궁하며 山吐孤輪月 :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하는데, 江含萬里風 : 강물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불어오네 遠水連天碧 : 먼 강물은 하늘에 연하여 푸르고 霜楓向日紅 : 서리받은 단풍은 햇빛에 더욱 붉었으며 塞鴻何處去 : 변방에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지 聲斷暮雲中 : 모든소리 저므니 구름속으로 사라지다 ◇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 <3세 명시〉 老木花開心不老 : 늙은 나무도 꽃이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구나 <5세 명시〉 木杓天北斗 : 맷돌 손잡이는 하늘에 북두칠성을 가리키고 銅柱地洛陽 : 맷돌 구리기둥 밑은 낙양땅이로구나 天動地寂理 :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고요한 이치는 坐看磨石間 : 앉아서 매돌가는 사이에서 보겠네 김시습(金時習) 1435(세종 17)~1493(성종 24). 문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고려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 일성(日省)의 자. 송정(松亭) 김반(金泮)·별동(別洞) 윤상(尹祥)의 문하. 3세에 이미 시를 능숙하게 해냈고 5세에는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어 주었다. 5세에서 13세까지는 당시 김구(金鉤)·김말(金末)과 함께 경학 3김(經學三金)으로 불리던 대학자 송정(松亭) 김반(金泮)에게서 《논어》《맹자》《시경》《서경》《춘추》를 배웠으며, 경학에 정통하여 명성이 높았던 별동(別洞) 윤상(尹祥)의 문하에서 《예서》와 제자백가를 익혔다. 1455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문을 닫고 3일이나 통곡하였으며 비정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그후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의 길에 올랐다. 이후 양주(楊州)의 수락(水落)·수춘(壽春)의 사탄(史呑)·해상(海上)의 설악(雪岳)·월성(月城)의 금오(金鰲)등을 두루 방랑하면서 세상의 허무함을 주로 노래하였다. 1458년(세조 4)에는 《탕유관서록후지 宕遊關西錄後志》를 집필하였으며, 1460년에는《宕遊關東錄後志》를 썼다. 이어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 宕遊湖南錄後志》를 저작하였다. 바로 이해에 책을 사기 위하여 서울을 방문했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태종의 둘째아들)을 만났으며 그의 권고를 받고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아 보았다. 1465년에는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였으며 2년 뒤인 1467년에는 다시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圓覺寺)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14) 금오산에서 《산거백영 山居百詠》을 지었으며, 1476년에는 《산거백영후지 山居百詠後志》를 썼다. 1481년에는 머리를 길러 환속(還俗)하였다. 그 뒤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때는 불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1485년에는 《독산원기 禿山院記》를 썼다. 나중에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길에서 만나게 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창손을 심하게 면박주기도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귀기를 두려워 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안응세(安應世)와 더불어 세속을 벗어나 산과 물을 찾아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었고 명문(名文)을 자랑하던 홍유손(洪裕孫)등과도 변함없는 교의(交義)를 다졌다. 부인과 사별한 뒤에도 재혼하지 않고 지내다 홍산(鴻山)에 잇는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무량사 옆에 묻었는데 3년 뒤에 파보니 얼굴이 산사람과 꼭 같았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절개를 굳게 지키면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용한 사상과 뛰어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특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존경하고 흠모하여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세조가 즉위한 후 재능을 아끼어 여러 가지 벼슬로 관직에 돌아오게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선조는 이율곡을 시켜 전기를 쓰도록 하였으며 숙종때에는 해동(海東)의 백이(伯夷)로 칭하였으며 집의(執義)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1782년(정조 6)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효온과 더불어 영월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어 있다. 저서로는 《금오신화 金鰲新話》 《매월당집 梅月堂集》 《십현담요해 十玄談要解》가 있다.「참고문헌」 《誌狀輯略》 《燃藜室記述》 《師友名行錄》 《梅月堂傳記》 《韓國人名大事典》 《金時習硏究》 (鄭炳昱, 서울大 人文社會科學論集 7)      

질문[유래] 한 많은 인조대왕 장릉(長陵)의 유래

탄현면 갈현리 산26-1에 소재한 장릉(長陵)은 월롱산 서맥내령 송리산(松裏山) 동남쪽 기슭에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국가 사적 제203호로 지정된 조선조 제16 대(재위 27년) 인조대왕과 그 비 인열왕후의 능으로 인조대왕의 초명은 종(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으로 선조의 손자이며 정원군(선조대왕 제5자) 의 아들,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의 딸 인헌왕후이며 비는 영돈령부사 한준겸의 딸 인렬왕후(한씨는 광해 2년(161) 왕비로 책봉 42세로 승하)이며 계비는 영돈령 부사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이다. 인조는 서기 1595년 선조 28년 11월 17일 해주에 서 탄생, 서기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에 봉해지고 이어 군에 진봉되어 1623년 3월 김 유, 이 귀, 이 괄 등 서인들의 광해군 반정으로 광해군 15년(1623) 3월 경운 당 별당에서 왕에 추대되어 즉위했다.  이듬해 부원수 이 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 을 점령하자 공주로 피난했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 했으나 계속 각지에서 반역 음모가 일어났다.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친명정책(親 明政策)을 표방한 결과로 1627년(정묘호란) 후금이 군사 3만으로 침략 평산까지 쳐들어 오게 되자 조정은 강화로 천도하였다가 형제의 의를 맺어 물러가게 했다. 또한 후금 누루와치는 명나라를 공격 청나라를 세우고 청태종이 되어 1636년(병 자호란) 청나라가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제의를 거부했다는 핑 계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하자 12월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가 군신예의로 소 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심양에 볼모로 보내기로 하자는 청나라측 조건을 수락하고 손수 청태종에게 나가 군신의 예로 무릎을 꿇는 치욕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했다. 이로 인하여 임진왜란 후 다소 수습된 국가기강과 경제상태가 다시 악화되었고 정계는 척화, 화의양파로 분립되고 서인은 공서, 청서 다시 공서가 낙 당, 원당, 청서는 산당, 한당으로 사분 오열되어 격심한 당쟁을 벌였고 낙당의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1645년 오랫동안 볼모 생활에서 삼학사 오달제, 홍익한, 윤집을 뒤에 두고 귀환한 소현세자가 의문의 변사를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하지 않고 2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서 현 종, 숙종 때의 예송문제를 야기했으며 이듬해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한 다음 3 명의 어린 손자도 제주도에 유배하게 되었다. 그 후 민심이 사분오열로 당쟁이 벌어지면서 김자점(金自點)이 척신으로 집권횡포를 벌리는 등에 어수선한 가운데 임금은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두고 북방과 해방에 유의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고 1634년 양전을 실시하여 합리화하고 대동청을 창설하여 강원도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회령, 중강, 경원을 개시하여 만주인과 민간무역을 공인했 으며 1628년 화란 사람 박연의 포착으로 서양인과의 교섭이 최초로 시작되고 정 두원과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가서 서양 문물을 수입해 왔으며 서양역법을 구입 하는 등 서구와의 접촉이 개시되었다.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 람」등이 간행되고 한편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쟁쟁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성기가 마련되었다.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재위 27년간에 걸쳐 한을 풀지 못하고 춘추 55세에 승하하자 원평군(현 파주)운천리 백운산하에 모신 인렬왕후와 동봉하였는데 석물틈에서 뱀이 많이 나와 영조7년 현 위치로 천봉하였다. 인조대왕은 재위27년간에 걸쳐 한을 풀지 못하고 갖은 수모와 파란만장을 겪으면서 원한을 씻지 못하고 슬하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한맺힌 임금이시다.〈소현세자는 인질로 잡혀간 3년이 지난 한시 한편 보내온 시구중에〉이국만리 떠나와 못 가는 신세 내 집은 서울장안 한강 물 기슭 달 밝은 밤 꽃잎 위에 눈물 지우며 맑은 바람 연못가에 버들잎 피네 꾀꼬리 울음소리 고향 꿈 깨우면 제비들은 날아와 경회루의 봄소식 알리며 온종일 누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곳 고향을 생각하니 눈물뿐이네 인조대왕은 이 글을 읽으면서 소쩍새 울음에 눈물 흘리며 시조 한 수를 읊으면서애통함을 이기지 못하도다 내라 그리거나 네라 아니 그릴런지 천리만향에 얼마나 그리는고 사창의 슬피우는 저 접동새야 불여귀라 말고라 내안들데 없어라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치욕도 원통하거늘 천리 타향 땅에 어린 자식을 볼모로 보내고 비통한 인조대왕의 한이 지금도 임진강변 장릉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구나 봉림대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여 북벌정책을 세우고 국방 을 튼튼히 하고저 하였으나 사색당파로 갑론 을박 싸우기만 하니 통분한 나머지 감상문 중에서 청석령(靑石嶺) 지나거냐 청하구 어디메뇨 삭풍(朔風)도 차도 찰사 궂은 비는 무슨 일인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내어 님 계신데 드릴고 궂은 비도 슬픔을 못 참아 하염없이 내리는 날 오랑캐 땅에 몰아치는 바람은 차갑기만 하구나 그 누가 초라한 내 모습을 그려 어버이인 임금에게 전할까 청강에 비 듣는 소리 그 무엇이 우습관대 만산홍록(滿山紅綠)이 휘두르며 웃는구나 두어라 춘풍이 몇날이리 웃을 대로 웃어라 이 짧은 시조 글 속에 강한 북벌의지가 담겨져 있으며 왕위에 즉위하자 이완(李 浣)을 훈련대장을 삼고 송시열 송준길을 등용 북벌의 꿈을 키웠으나 11년만에 세 상을 뜨니 국치의 한은 물거품 속에 한이 서려있다. 그 무렵 민족의 비문을 읊은 충의가(忠義歌)가 많이 나와 문학적 전성기를 이루어 시대적 배경과 문학작품이 우리의 안보의식 고취와 국가관을 확립하는데 많은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질문[유래] 교하 노씨(交河盧氏)시조와 근원의 유래

 중국 주나라 건국공신 강태공(姜太公)의 후예 후(候)가 제나라 노현(盧縣)에 살아 노씨가 된 후 곤주자사 노진순(袞州刺史 盧震順)의 아들 노수(盧穗)가 범양(范陽 )에 살다가 신라 효성왕 14년(755)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정착 귀화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이 전부 높은 벼슬길에 올라 광산백, 교하백(塢), 풍천백(址), 장연백, 안동백, 안강백(坤), 연안백(增), 평양 백(坂), 곡산백(坦)으로서 9형제가 모두 봉작됨에 따라 각각 본관을 광산(光山), 교하(交河), 풍천(豊川), 장연(長淵), 안동(安東), 안강(安康), 연일(延日), 평양(平壤), 곡산(谷山)으로 삼게 되었다. 교하 노씨 시조 오(塢)의 아들 강필(康弼)이 기계(杞溪)에 살면서 본관을 장산(章山)으로 하였으며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어 태자 태사로 삼한공(三韓公)에 시호를 받았으며 자손들이 연달아 벼슬을 하여 오다가 그의 10대손 척이 충열왕 당시 경영옹주와 결혼 삼중대광 첨의 정승으로 경양부원군에 있으면서 아들 서원군 제(瑞原君 濟), 창성군 진, 경원군 언, 신양군 영, 딸 원순제비 (元順帝妃)와 4남 2녀를 두었다. 그의 둘째 아들 창성군 진은 삼중대광 보리공신 판밀직 사사로 제효공(濟孝公)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선(瑄), 숙(璹), 균(鈞)과 딸 공양왕비로 2대에 걸쳐 왕실과 척분을 맺어 국혼을 이루었고 그의 셋째아들 균은 보공장군 천우 위대호군(保功將軍 千牛衛大護軍)으로 영의 정에 증직 되었으며 그의 아들 노한, 노석, 딸 강준계(姜准季) 등 2남 1 녀를 두었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가 공양왕 3년(1392) 7월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 삼척에서 살해한 후 조선조를 창건 왕씨 일가를 멸족하게 되자 노한은 당시 보종사랑적경서승(補從仕郞積慶署承)으로 있다가 어머니 개성왕씨와 아들, 딸을 데리고 현 탄현면 성동리(작골) 오두산하 삼도품(임진강과 한강 합류지점) 어귀에 아들 물재(物載)와 더불어 석벽에 굴을 깊이 파놓고 은신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이 부락을 작굴이라 부르고 있다. 작굴 동리에서 물재(物載)의 아들 (懷愼, 由愼, 恩愼, 好愼)과 딸(鄭潔, 丁活, 李鍾衍, 南倫) 4남 4녀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이 굴에서 공부를 하였다는 전설에 내려오고 있으나 지금에는 살던 집 터에 500여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만이 쓸쓸히 남아있으며 현재 오두산 개발로 인하여 전부 훼손되고 있다. 노한은 조선조 개국이후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당시에는 경기 황해도 감찰사 한성부윤 형조판서 우참찬겸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하다 퇴임하였으며 노량진 강가에 효사정을 건립 고향을 오르내리며 이웃마을 법흥리 약산동으로 이주 휴율강이 흘러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학당을 건립 후학을 지도하였다 하여 이 지역이 학당포라고 전해지기도 하나 지금은 경지정리로 말미암아 농경지로 변모되고 말았으며 또한 이 집터에는 빈집(노재 순가)과 그 앞에 500여년 가량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집을 지켜주고 있다. 그의 아들 물재(物載)도 음직으로 태평관직을 거쳐 세자우위솔겸상서, 지돈령첨지, 중추관지돈령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셋째 아들 사신(思愼)은 교하향교에서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에게 지도를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뛰어나 문종 1년(1451)에 생원시, 단종 1년(1453)에 식년문과 병과 급제하고 집 현전박사로서 사가독서 한 후 발영시와 등후시 등 장원급제함으로 세조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호조판서 대제학을 지냈고 예종즉위(1468)의 대공신 3등과 좌찬성이 되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성종2년 (1471) 좌리공신 3등이 되어 이조판서를 겸했고 영돈령부사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와 휴율강이 흐르는 송리산 남맥 끝머리 아담한 곳에 정자를 건립 삼국사 절요를 편찬하였다. 이로 인하여 본관을 선성(宣城) 또는 교하(交河)로 개관하 였으며 이 연유로 15대조 노오(盧塢)를 교하백으로 봉작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성종 18년(1487)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 성종 25년(1495) 영의정에 올랐다가 10월 에 사직하고 이 정자에서 정객들과 정치문답을 하면서 시회와 낚시와 더불어 교하향교 출신으로서 수시로 향교에 나가 여러 문도들에게 강론을 베출며 여생을 마치었다 하며 이곳을 지금까지 노정뿌리로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500 여년 묵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남아 쓸쓸히 노정승을 사모하고 있다. 그 동안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에는 훈구파의 중신으로 유자광과 함께 세조를 비난한 김종직의 규탄에 동조했으나 사림파를 전부 몰아내려는 데에는 반대하여 많은 선비들을 구출하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조, 성종의 신망을 받아 경국 대전과 호전, 향약집성방을 서거정과 함께 국역하였고 여지승람을 강희맹, 양성 지 등과 편찬한 대학자이시다. 연산군 4년(1498)에 돌아가시니 문광으로 시호 되었으며 서울 노량진 금천고 사동에 안장되었으나 도시계획에 따라 고향 근처인 파주읍 백석리(도장골)로 1942년 9월 증조모 개성왕씨와 조부모(노한) 아들 공필 (公弼), 공유(公裕), 계종(繼終)이 이장됐다  

질문[유래] 판도공 윤승례(版圖公 尹承禮)후손 명문가족 유래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의 13세손 윤승례 선생은 영평군 윤척(鈴平君 尹陟 )의 자(尹承休, 承度, 承順, 承慶,承禮) 오형제 중 끝분으로서 장단군 장목동(현장단군 진동면 작목리)에서 사시면서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신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주살 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 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수차에 걸친 왜구(倭寇)들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 웠으며 창왕 1년(1389)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근(權近)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 명제(明帝)지시에 따라 공양왕을 즉위케 하였다. 이어 판개성부 사(判開城府事)와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 공양왕 4년(1392) 파산에 은거하 시다 돌아가시니 작목동 묘좌에 안장 후 순충보조공신과 문충으로 시호를 받으신 충신이시다. 따라서 그의 아들 중 윤번선생은 우왕10년(1384)에 출 생하시어 공양왕 4년(1392) 조선조 개국후 음보(陰補)로 신천 현감을 거쳐 세종10 년(1428)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에 이르러 딸이 수양대군(首陽大君)과 결혼을 하게되자 어머니(安東權氏)를 모시고 한양으로 올라와 살게 되었으며 군기시부 정(軍器寺副正)에 승진, 이어 이조참의 공조참판 호조 참판을 역임하는 동안 세종 5년 친상(母親)을 당하매 사폐지지인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에 안장하게 되었다. 세종21년(1439) 경기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성 우참찬이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중추원사 세종29년(1447)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세종30년(1448) 7월 14일 65세로 돌아가시니 교하면 당하리 어머니 묘 앞에 예장을 모신 후 파평부 원군과 이정으로 시호를 받으시었다. 이로 인하여 판도공파 후손들이 이곳에 정 착하게 되었다. 단종4년(1456) 수양대군이 세조대왕이 되자 정희왕 (尹의 딸)로 추봉하게 되자 이분들의 후손들 중 국구부원군과 공신부원군( 尹士昨, 甫, 元衡) 정승판서와 당상관들이 7,8대에 걸쳐 수십명이 배출된 문한 가로 수백호에 대성가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수차에 걸친 난 시로 인하여 실전하였던 윤관장군(尹瓘將軍)묘를 관하 광탄면 분수리에서 차저 수호관리하는 한편 지방문화재로 승격시키면서 여충사를 건립 유림향사로 승 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말미암아 현재는 전국적으로 이분의 후손 수백명이 모여 매년 향사를 울리는 실정이며 따라서 파평윤씨 중 앙회장 윤성민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1988년 2월 27일 국가문화재 제323호로 승 격하게 되었다. 또한 별지와 같이 선대에 실존된 선조 중 관하 법원읍 웅담리 상 서대에 신위(神位) 3위와 7위분의 비를 설단하는데 있어서도 판도공파 종중에서 적극적인 협조와 주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종사라 하겠다. 파평윤씨 역사집람 오책1권(繹史輯覽五冊一券)에 의하면 영평군 윤섭(鈴平君 尹涉) 묘는 장단 동 저가사리 경좌(長湍東渚加士里庚坐)에 장례를 모시고 그의 자 승례(承禮)는 장 단조목동묘좌(長湍祚木洞卯坐)로 명시되었으나 6·25동란으로 남북이 가로막히는 한편 군사 보호지역으로서 성묘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나 문화체육부 문화재 관리국 학술연구회원들에 의해 장단지역을 답사 중 아래 판도공 묘를 찾게 되어 공개하는 바이다. 

질문[유래] 온정을 베푸신 예조판서 민영달(閔泳達)의 유래

민영달은 군수 민관호(閔觀鎬)의 아들로서 철종10년(1859) 1월 24일에 태어나 마 포 용강동에서 성장하고 고종 22년(1885) 중광문과 병과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고종 29년(1892)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형조, 예조판서 좌참찬등을 역임 했다. 호조판서 당시 고종31년(1894) 7월 김홍집(金弘集) 총리대신이 내각 직제 개편(3정승 6판서제도 폐지)을 단행하면서 내부대신이 되었다. 고종32년(1895) 12 월 3일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사직하였 으며 순종대왕 융희 4년(1910) 8월 22일 한일합방 이후 일본정부가 남작(男爵)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사에 5천원을 기증한 그가 예조 판서로 있을 당시 중부지방에는 제1안성(安城), 제2공능(恭陵), 제3홍연(紅峴) 시 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그런데 파주시 공능 장날 한성에서 깡패들이 몰려 와 갖은 욕설과 구타 등으로 돈을 뺏고 갖은 만행을 저질러 시장을 어지럽히자 수 개월동안 시장을 개설할 수 없었다. 당시 민영달은 문발리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고종19년(1882)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청나라에 건너가 4년 동안 유폐되었던 대원군이 귀국, 원세기와 협력해 재집권을 노리고 청나라의 군사가 출동하니 민 비(민영달과 사촌남매지간)는 충주로 은신하고 민영달은 서패리에 거주한 내시부 사 반학영 주선으로 문발리에 내려와 한성을 오르내리면서 양자(養子) 민태식(閔 泰植)과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조리면 오산리 직강(直講)으로 있던 윤면학(尹勉學) 이 찾아와 어수선한 시장 실태를 알리고 수습해 줄 것을 간청하니 민영달은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며 의금부에 연락, 나졸들을 풀어 깡패들을 전부 소탕하니 시 장이 원상태로 개설되었다. 그 이후 지역 주민과 상성현의 일이니 폐할 수 없고, 매와 개 또한 내 좋아하니 폐할 수 없으되 두 가지 모두 그릇된 것은 아니니 어찌 성리를 괴롭게 하겠습니까’하였다 한다. 또한 쌍매당(雙梅堂)이 하루는 임진강을 건너 서울로 가는데 길가 산골짜기에서 책읽는 소리가 나기에 ‘이는 반드시 안준 일 것이다’하면서 가보니 과연 안준이 왼손에 매를 들고 오른손에는 책을 들고 나 무에 의지하며 읽고 있었으니 서로 바라보고 크게 웃었다 한다. 안준은 사람됨이 관대하여 평생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왜적이 승평부(昇平府)를 침략하였을 때에도 책을 읽으면서 활쏠 준비를 하고 하인들에게 급하게 서둘지 말라는 말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안준은 그의 아버지 안목과 함께 장포뜰 개포래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어 살기좋은 고장으로 발전케 한 파주땅의 개척자이자 선구 자, 문학자, 농학자였다. 이 지역 주민과 상인들이 입을 모아 그의 고마움을 칭송 하고 그의 공적을 영원히 기리고자 불망비를 세웠다 한다.그는 1924년 9월 15일 숨을 거두었으나 많은 독립자금을 내놓은 공적으로 국가 유공자 훈장을 받아 대 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38년 조리면 사회담당을 하고 있던 이규환은 매년 춘추로 각 부락 일제청소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당시 봉일천 주재소 순사부장 상 전등길(桑田藤吉)은 일본인이면서도 이 불망비에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깨끗이 할 것을 봉일천리 구장(區長) 홍길창(洪吉昌)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6·25 로 개천에 쓰러져 버린 이 불망비를 현 대한노인회 파주지회장 이규환(李圭煥) 주 선으로 金龍鎬 , 白昌基, 李後永, 高善在, 尹仁石, 金容大, 郭熙錫, 梁在奎 등이 금 촌리 유신석제 오흥운(吳興運)에게 지도를 받아 1979년 3월 당초 거북바탕을 잃어 버린 채 비대만을 새로 만들어 개축하였다. 그 후 1983년 조리면장 李仁熙가 이 자 리에 면사무소를 신축하게 되자 면모를 갖추고 정화 보존하게 되었다. (양손 閔內大, 서울 역촌동 355-0462)  

질문[유래] 용미리석불의 유적의 유래

이 입상석불은 광탄면 용미리 산 8번지 중턱 마애불(磨崖佛)로 고구려 응화(應化) 불기천년(서기 366년)에상효군(相孝軍)인 차호진(車好鎭)과 심장기(沈長己)에 의하여 천연암벽을 동체로 삼아 불상높이 57척 2촌(18미터)의 기형적 거대한 입상을 영조(靈造)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각부에 토속적인 미풍이 짙어진 명작품으로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왼쪽의 둥근 갓을 쓴 불상 원립불(圓笠佛)은 사각형의 얼굴에 자연적인 미소가 떠오르고 오른쪽의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뿐 신체 각부의 조각수법은 두 불상이 같다. 원불상은 남상, 방립불은 여상이라 한다. 그리하여 항간에서는 부부상이라는 말들을 하며 오른편 방립불의 자비와 인종이 동양적 신비의 미소를 느낀다면 왼편 원립불은 활발하면서도 장엄수려한 용모를 보게 된다. 또한 방립불과 대치하여 원립불의 오른 어깨위에 작은 동자불이 세워졌는데 이 석벽아래 세워진 7층 석탑과 함께 1953년 10월 11일 이승만박사 내방지시로 박이순(朴彛淳)군수와 이만수(李晩秀), 남궁 연(南宮 鍊) 등 지방 우지들의 후원으로 새로 건립되었으나 후에 철거되었다. 이 석불 아래 감노정약수(일명 옷나무 약수)를 석불에다 떠다놓고 축원하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오늘까지 내려오며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고 겨울에는 온수와 같다 한다. 또한 병약자가 이곳에 와서 10개월만 먹고 요양하면 십중팔구는 완치한다고 하며 최근에 이 석간수(石間水)를 감정한 결과 유명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확실한 문헌이 없어 전설에 의하면 고려 13대 선종조후사가 없어 원신공주를 후궁으로 삼은 후 어느날 공주에게 도승둘이 현몽하여 암벽에 미륵불을 건립 기도할 것을 권유 완성 후 왕자를 얻었다는 설과 여조말 삼각산하 이 지역에 왕기가 서려 있어 미륵불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석불앞 양지동 현전(現田)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말할 수 없는 구두방추요 고집쟁이 욕심많은 영감으로 동냥하러 찾아오는 사람에게 학대와 구박을 하여 빈손으로 쫓아버려 인근주민들에게 고약한 늙은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한 도사가 하루는 찾아가 시주를 청하니 역시 거절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괘씸히 생각한 나머지 이 영감을 망해 놓겠다는 결심으로 몇일 후 다시 찾아가 공손히 절을 하고 나서 이 뒷산기암에다 2개의 부처를 조각하여 세워 보시면 만석꾼이 될 터인데 하고 돌아서 오니 쫓아오며 그게 정말이냐고 물어 반문하자 “틀림없습니다”라고 공손히 합장하고 물러났다. 옳게 여긴 욕심장이 영감은 많은 돈을 들여 쌍불상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흐지부지 재산이 없어져 버리고 영감은 울화병으로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한다. 또한 석불 앞 200미터지점 밭 가운데 장사바위와 말바위가 나란히 있는데 이것을 부처님의 공양미바위로 부르기도 하는데 약 800근이나 되는 두 바위가 밭갈이에 거추장스러워 밭주인이 깨어 없애 버리려고 징으로 바위를 뚫으니 징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오며 큰 소리가 나와 깜짝 놀라 정신을 잃고 자빠져 수개월동안 병석에서 고생하였다 하며 그후 일절 손을 대지 못하였다 한다.  

질문[유래] 화석정(花石亭)에 얽힌 유래

파평면 율곡리 산 100번지에 있는 화석정은 수많은 사연이 있는 곳으로 옛날 한양과 송도를 거쳐 신의주로 가는 국도변 임진나루터 길목 우뚝 솟은 기암절벽에 자리잡고 있는데 고려말 대유(大儒)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의 유지(遺址)로서 야은 선생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이라 하였다. 이조가 개국되자 1400년(정종 2) 길재선생은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명목으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화석정터에서 후배를 양성하면서 교하향교 훈도를 지냈다. 그러나 수차 조정에 출사하라는 성화로 경북 금오산에 은거 학문을 연구하여 후배 양성에만 전념 세월을 보내던 중 1419년(세종 1) 67세로 별세하니 수많은 문인들이 선생의 얼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웠는데 세종대왕은 그의 충절에 탄복 금오서원(金烏書院)으로 사액하고 충렬공이라 시호를 내리셨다 한다. 그 후 폐허된 자리에 율곡선생의 5대조이신 강평공 이명신(李明晨)이 서기 1443(세종 25년)에 정자를 창건하고 양원 이숙함(楊原李淑緘)이 화석정으로 이름을 지었다 하며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으로부터 수축한 후 율곡선생께서 손수 새로 터를 닦고 중수한 유서깊은 정자이다. 선생은 국사의 여가와 퇴관 후 여생을 보내면서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중국 사신들이 자주 찾아 금시청유(昑詩淸遊) 하였다 한다.  정자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정하에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주야로 항선(航船)이 오르내리며 밤에는 어화(고기잡는 등불)로서 호화 찬란하였으며 당대 여류가인 운초(雲楚)라는 가수는 송경을 지날 때, 온종일 꾀꼬리는 울고 이원성은 고려를 통곡하네(盡日黃鶯啼宛是哭高麗)라는 시조를 읊으며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읊었던 것과 같이 이곳의 물소리는 또한 말할 수 없는 선경이다. 그러나 유서깊은 명승으로 알려진 화석정은 우리민족의 비극인 선조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득이 선조대왕께서는 의주로 파천하게 되어 4월 29일밤 어두운 침침한 임진나루 절벽에 당도하니 마침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져 뒤쫓는 왜적 때문에 빨리 강을 건너가야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난감하기 이를 때 없어 중신들과 의논 끝에 임진나루 옆에 있는 순청(巡廳)에 불을 질러 도강키로 하고 불을 지르니 워낙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라 별로 시원치 않아 할 수 없이 호종하던 이항복이 화석정에 올라가 이에 불을 지르니 화광이 충천하여 무난히 배가 건너갔다 한다. 이 화석정은 율곡선생이 이럴줄 미리 알고 정자에 있을 때 들기름을 제자들에게 수시로 한 종지씩 가져오라 하여 매일같이 기둥, 도리, 석가래 등에 반질반질하게 먹이어 두었었다 하며 또한 백사 이항복도 이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소실된 것을 율곡의 증손 이후지와 이후방이 재건하였으며 6·25사변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66년에 국회의원 신윤창의 주선으로 일부 정부보조와 각지 유림들의 정성으로 새로 복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화석정(花石亭)이란 현판을 걸게 되었다. 따라서 서기 1973년 군비 보조로 유림들과 주위 환경을 정화하고 1974년 9월 26일 지방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으며 1980년 파주시 예산으로 보수와 환경정리를 새로 하고 자주 정화를 하고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수시로 줄을 이어 찾아오고 있다. 정내에는 많은 시액(詩額)이 있었으나 그중 유명한 것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이율곡 8세 작시로서 백세현판이라고도 전해지며 우계 성혼(牛溪成渾)과 손목(孫穆)이 92세때 근서한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서거정, 이숙함, 이의석, 이의무, 권람, 정철, 오억령, 송시열, 박세채 등이 화석정에서 시조를 읊었다 한다. 〈율곡선생의 8세시〉 임정추기만 소객의무궁(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산토고륜월 강함만리풍(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새홍하처거 성단모 운중(塞鴻何處去 聲斷慕 雲中) 숲속 정자에 가을이 깊었으니 야유하는 나그네 뜻은 무궁하며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하고 강은 멀리 바람을 머금고 불어오네 먼 강물은 하늘에 연하여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에 더욱 붉었으며 변방에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모든 소리 저무니 구름속에 사라진다. 

질문[유래] 파주 어가행궁(御駕行宮) 내력의 유래

 우리나라는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러 나라 임금님이 궁중에서 행차할 때 수많은 중신들을 대동호위하면서 궁중악을 불며 장렬한 행렬을 펼쳤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고장은 임진강을 경계로 송도와 한성이 각각 백리 거리 이내에 있어 여러 능과 원 또는 왕족묘가 분포되었으며 아름다운 임진강을 찾아 왕들이 자주 행궁하였다.  고려, 조선조를 통하여 우리 고장 어가 행궁을 살펴보면 별지와 같이 고려조의 태조와 공민왕 조선조의 태조와 문종, 효종, 숙종, 영조, 철종 대왕의 행렬은 호화찬란한 행렬이었고 다른 임금님들은 망명 또는 폐위되어 가는 행렬로서 슬픔에 젖은 것이었다.  

질문[전설] 고려 12지신과 벽화 고분 유적의 유래

진동면 서곡리(창화동)112번지 소재에 있는 고분은 고려조 판후부사 한조(문구공)의 아들인 예문춘추관태학사 한상질(1350~1400)의 것이며 문열의 시호를 받은 대학자 묘 (한명회 조부모)라 한다.그 묘 하단에 12지신상벽화 분묘가 있으나 이는 전설에 의하면 문열공이 일시적 애처가 되었던 무당등의 좌수(무속도감) 묘라는 말도 나오고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로서 1980년 전부터 청주 한씨 문경공파 후손과 이 지역 주둔 장병과 주민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지만 문화체육부에서 발굴조사단 (단장 정양모)을 구성하여 발굴작업을 시작한 결과 일제시대부터 여러 차례 도굴을 당하여 벽화만이 남아있을 뿐 다른 유물은 없었으며 내부가 어지럽혀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재차 이어령 문화체육부장관 입회하에 원로 고고학자 김원용 박사와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 발굴단장 정양모, 부단장 김기웅, 발굴 전문위원들이 고분의 양식내부 구조 등을 근거로 조사한 결과 이 벽화가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밀한 명문과 묵서 확인 등 적외선 촬영을 끝내고 그 내부가 상하지 않도록 밀폐한 후 영구보존하기로 하고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하였다 한다. 지금까지 고려 벽화 고분으로는 경기도 개풍군의 공민왕 현능과 경북 안동 서삼동 등 남북한에 각각 4개씩 발견되었으나 고려때 것으로는 최초로 무덤내 부석벽에 12지 인물상과 북두칠성 삼태성을 그린 선명한 성수도의 색채선의 탁월한 작품이 있어 당 시의 생활사 복식사 연구에 결정적 연구 자료가 되었다 한다. 〈壁畵古墳 構造〉 上段 1號墓 外部 : 圓形 護石이 둘러져 있는 높이 160cm, 봉봉 정상에서 230cm,둘레 450cm 內部 : 상자형 石室에 東西北面에 名名 1枚式 石扉가 세워져 있으며 바닥에는 장방형의 벽돌이 깔려있고 석실에 크기는 길이 145.5cm, 넓이 94cm, 높이 81cm 石扉로 橫口式 石室로서 크기는 길이 282cm 넓이 118.5cm, 높이 135cm 石扉의 壁畵 內容 : 북벽에는 道袍를 입고 笏을 두손으로 쥐고 관모를 쓴 인물좌상은 주인공 을 연상케하며 동서벽에 힘찬 墨線과 각각 5인씩 10여명의 입상인물이 도포를 입고 붉은 색의 입술과 앞가리개 束帶를 두르고 두손으로 笏을 쥐고 名己 12지상 모양에 中 頭神을 삼고 있는 것은 侍從으로 추측되며 天井에는 北斗七星과 三台星이 星宿圖가 그려져 있다.이러한 벽화내용을 볼 때 예로부터 무속에서 12지신을 모시고 하늘에 북두칠성과 삼태성을 승모 축원하여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 벽화로:明宗(1170~1197) 智陵 恭愍王(1351~1374) 玄陵 水落岩洞 제1號墓 경기도 장단군 法堂坊墓 경북 안동시 西三洞 고분 경남 거창군 屯馬里 고분 강원 철원군 門內里 고분 

질문[유래] 동의보감 구암 허준(龜岩 許浚)선생의 유래

구암(龜岩)선생은 명종 1년(1539)에 태어나 유의태 한의원과 산초스님(도승)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의를 연구한 끝에 선조8년 왕을 진찰한 후 대의가 되어 궁중왕족을 치료 하는데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 25년(1592) 어의(御醫)로서 끝까지 왕을 호종한 공으로 1604년 호성공신 3등이 되어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지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으나 중인 출신에게 당상관의 위계(位階)를 줄 수 없다는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한 때 파직당한 후 광해군 1년(1609)에 어의로 다시 복직 광해군 2년(1610) 16년간 의학을 연구 끝에 25권의 방대한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완성 의서국역(醫書國譯)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광해군 7년(1615)에 죽으니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 산 129에 안장되었으며 숭록대부에 추록된 동방의 명의로서 의학계의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4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수차에 걸친 난시로 말미암아 묘가 실전되어 내려오다가 최근 비무장 지대에서 군인들과 본손에 의하여 비석이 발굴되자 의성(醫聖)으로서 각계 각층에 한의사, 문학가, 자손들로 하 여금 허준기념사업회(준비위원장 문종화)를 구성하고 양천허씨 대종회장 허명(許明)의 주선으로 허준과 부인(김씨)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400여년만에 추향제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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