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자료 한마당

전설모음

질문[전설] 수레넘이고개(車踰嶺)에 얽힌 전설

 법원읍 갈곡리에서 양주군 가래비쪽으로 넘는 고개를 수레넘이고개라 한다. 이것은 한자 표기로 차유령(車踰嶺)이라 하는데 실을 쉰 넘이 고개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이 험악하여 도적의 소굴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적은 숫자로는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최소한 쉰명(50명) 이상이 되어야 넘을 수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법원리쪽 희원에서도 쉰명(50명), 가래비쪽에서도 쉰명(50명)이 뭉쳐서 넘었다고 한다. 따라서 재 이름이 쉰 넘이 고개라 하였던 것인데 그 후 차츰 변하여 쉰 넘이가 수레넘이로 되고 또 차유령(車踰嶺)으로 변해 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전설] 소령원에 얽힌 전설

영조는 숙종대왕의 후궁인 숙빈 최씨로 부터 서기 1694(숙종 20)에 탄생하였으며 1719(숙종 44)년에 숙빈 최씨가 49세로 서거했다. 영조대왕은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 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있으면 별궁과 같이 사냥을 취미삼고 이 산 저 산을 두루 다녔다. 따라서 풍수지리에도 밝아 산세를 살피면서 다니던 중 지금의 광탄면 용 미리 산을 지나다 보니 초라한 장례로서 산소자리를 파는 것을 발견 올라가보니 험준한 망지에다 자리를 잡아 수인이 역사를 하는 것이었다. 하도 딱한지라 상주 에게 사연을 물은즉 원채 가난한 집에 태어나 좋은 자리에 산소를 쓸 수 없다는 사 연인 것이었다. 그럼 이 자리를 봐준 사람은 누구냐고 물은즉 이 아래 산기슭에 사 는 선비가 묘소를 정하여 주었다는 것이었다. 상주가 너무나도 양심이 바르며 겸 손함을 본 영조대왕은 가상히 생각하고 내가 이 뒤에다가 산소를 다시 잡아주도 록 하여 줄 터이니 서슴치 말고 추진하라 하고 양주목사에게 쌀 1가마니와 돈 100 냥을 보내라고 편지를 써서 별궁에게 보내니 양주목사가 이를 보고 즉시 포졸을 시켜 돈을 보내어 장사를 잘 치르게 하였다.  장사를 치른 후 영조대왕께서 산을 내 려와 선비를 찾아서 이런 나쁜 곳에 산소자리를 잡아 주었느냐고 묻자 이 선비 말 이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이 생길 자리인데 왜 그러냐고 말하니 영조대왕께서 깜 짝 놀라면서 자기가 한 일이 꼭 맞아 감탄하며 치하를 하고 돌아가면서 생각하기 를 명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얼마 후 사친인 숙빈최씨가 서거하자 각지 에서 명사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되었으나 영조대왕은 이들을 전부 물리치고 아무개에 사는 이 선비를 데리고 오라하여 묘지를 잡은 곳이 바로 광탄면 영장리 산1번지 소령원인 것이다. 영조대왕은 일찍이 효성이 지극하여 사친 묘전에 묘막 을 짓고 친필로 묘비를 세워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느날 궁궐에 들어가고 싶어 차 비를 갖추고 떠나 지금의 파주시와 고양시 경계인 혜음령 고개를 넘으려 하던 중 궁궐에서 내려온 관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 고개에서 서기 1724년(경종 4) 영조 임금으로 추봉되는 왕명장을 받게 되어 이 고개를 수령령(授令嶺) 고개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영조대왕은 사친 숙빈 최씨 묘소인 소령원 근방 전주민들에 게 철거령을 내려 수렵장 및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한편, 영조대왕은 즉위 후 묘소 동남편에 친필비각을 네 곳에다 세웠다고 하며 명복을 빌기 위하여 보광 사를 중수하는 한편 어실각을 짓고 매년 백중날 절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 며 또한 꾀꼬리봉하 고양리 벽제관에서 보광사를 넘어 다니는 가파른 고개길을 더 파서 얕이라고 어명을 내리니 이 고개가 더파기 고개인데 임진왜란 당시 사명 대사가 이끌었던 승병 수백명과 이여 송제독이 지휘하던 청나라 지원군 수만명 이 왜군에게 몰상당하게 되니 승병·청병들의 수많은 시체가 고령산 전역을 거쳐 늘비하였다 하며 더파기 고개에 더욱 많아 후에 되박고개라 개칭하게 되었다 한 다. 영조는 소령원 자리를 잡아준 명지사 이 선비를 후사하기 위하여 궁궐로 초대 극진히 대접을 한 후 얼만큼 맞추나 시험하기로 하였다. 영조대왕은 경기도 일대 에 명당자리가 몇 군데 있느냐 하고 물으니 어디는 정승 날 자리, 어디는 판서 날 자리 등등 수십군데를 마구 지껄이고 있어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명지사임 이 틀림없고 학문에도 뛰어나 유능한 인재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한번만 더 시험 하리라 생각하고 별궁을 시켜 쥐 한 마리를 잡아오라 하여 용상 밑에 감추고 “이 번 질문을 맞추면 큰 벼슬도 주고 후사할 것이나 만약 맞추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 ” 하며 하문하기를 짐의 용상 밑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고 하자 이 선비는 한참 생 각한 뒤에 쥐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하니 아연실색한 영조대왕께서는 그럼 몇 마리가 들어있느냐? 고 하자 3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니 이 놈 짐을 속이는구 나 하고 이놈을 데려다가 참하여라 명하였다.얼마 있다가 별궁이 달려와서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다고 하자 영조대왕은 이런 인재를 등용 정 사를 맡기리라 생각하고 즉시 이 선비를 죽이라고 명한 것을 취하면서 별궁을 시 켜 죽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별궁이 가보니 애석하게도 이미 죽은 후라 할 수 없이 돌아와서 그 사연을 고하니 영조대왕은 깜짝 놀라며 짐의 잠깐 실수로 나 라의 아까운 인재를 잃었노라며 애석해 하셨다. 영조는 사친의 묘가 능(陵)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승격(추봉)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조정 중 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반대가 심한 중신(朴師正)을 소령원 제사 지낼 적에 봉노를 시켜 숯불이 이글대는 향로를 맨손으로 들게하니 열손가락 사이로 기름이 흘러 내리는 찰나 영조께서 이래도 능으로 책봉하겠느냐고 하문하니 소신은 죽사와도 능지하원지상(陵之下園之上)입니다라고 해서 능으로 격상하는 것을 단념했다고 한다. 어느날 먼동이 틀 무렵 순회를 돌다가 무악재에서 숯장사 김세휘(金世輝)라는 노인이 고개마루 에서 쉬는 것을 보고 그대는 뉘시며 어디에서 살며 무엇을 하느냐고 물은즉 노인 의 대답은 양주 고령에서 사는데 가세가 빈곤하여 밤이면 능에 가서 참나무를 베 어다가 숯을 구어 서울장안에 져다가 팔아 생계를 꾸린다고 하니 영조께서 고령 능이라는 말을 백성으로부터 처음 직접 들으니 기쁜 마음으로 시종을 시켜 미행 하여 숯을 판 다음 몇 시경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명 후 환궁대기중 그 시각에 그 노인이 들어와서 부복하고 있는지라 영조께서 고개를 들라하니 마지 못해 숯 장사 노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새벽에 만난 분이라 얼굴이 파랗게 질리어 목숨만을 살 려 달라고 애원하자 안유를 시키면서 편전으로 들게 했다.영조께서 술을 나누면 서 그대의 소원은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이니 숯 장사 노인에게 말하라 하니 그 노 인은 벼슬자리를 달래지도 못하고 소원은 대대손손(代代孫孫) 능세원(능에서 나 무를 간수하는 직책)을 하게 해달라고 하자 특명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작위 를 내리시고 대대로 능세원을 지내게 되었다 하며 현재 영장리에 김해김씨가 몇 집 살고 있는데 김호길(金好吉)의 8대손이 된다하며 당시 능참봉(陵參奉) 능순원 (陵巡員) 능수복(陵守僕)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질문[전설] 포수바위(砲手岩)에 얽힌 전설

 법원읍 웅담리 입구 좌우측에 기암절벽으로 병풍처럼 둘러 쌓인 산이 있는데 산어귀 우측에 기암괴석이 솟아있는 산봉우리에 구한말엽 포수가 총을 메고 이산저산 돌아다니다가 이 산에 올라 두루살피니 건너 산봉우리 아래에 있는 산돼지를 발견하고 총을 당기려고 하면 사람으로 둔갑을 하여 앞으로 가는지라 그리하여 다시 눈을 비비면서 보아도 산돼지가 분명하여 머뭇거리다가 총을 쏘아 맞추어 죽이고 가서 상세히 살펴보니 새끼들이 죽은 암놈의 돼지 젖을 먹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어 슬피 탄식하면서 포수사냥을 포기할 것을 결심하고 이 산봉우리에 올라 떨어져 죽었다 하여 지금까지 포수바위(砲手岩)란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질문[전설] 순절한 곡산노씨에 얽힌 전설

 우리 나라 조선조에는 여성들의 개가금지법으로 인하여 일부종사를 기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녀과부를 비롯 수절한 열녀, 열부가 많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갖은 사연도 많았거니와 관하 자운서원경내에 있는 율곡선생님 내외분의 분묘가 전후면에 있는 것을 보게되어 누구나 의아심을 갖게 된다. 이는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들은 방방곡곡 각 지역을 휩쓸고 다니면서 양민학살과 부녀자 강탈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는데 선조 18년 율곡선생이 돌아가실 때 임진왜란이 몇 해 후 일어날 것을 예측 유언하자 부인께서는 ‘난리 피신을 나는 어찌한단 말이오’ 하니 ‘우계선생을 찾아 부탁하라’ 하니 ‘거절한다면요’‘그러면 혹시 내 무덤 뒤에 와보면 난리를 피할는지’ 하며 운명을 거두시었다 한다. 7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인은 행주산성으로 권율장군을 찾아가 배알하고 사연을 말하니 ‘나 역시 식솔의 생사도 모르고 있으며 전세가 불리하여 감히 사모님 피신을 책임진다고 어찌 하겠습니까?’ 하였다. 부인은 할 수 없이 왜군들에게 쫓기면서 선생의 묘서에 이르러 변을 당할까 두려워 거느리고 갔던 하녀에게 아랫마을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보낸 후 선생의 신주를 소중히 묘소 앞에 묻고 나라 운세를 걱정 세상을 원망 통곡하면서 거룩한 남편의 업적을 숭모 참배하려고 하는데 왜군이 몰아닥쳐 겁탈하려하자 ‘이놈들아 동방 예의의 나라인 우리 나라를 어찌 무단침범하여 행패를 하느냐’고 크게 꾸짖고 선생묘소 용미에서 비수로 자결하였다. 물을 떠가지고 돌아오다 나무숲 속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본 하녀는 왜군이 흩어지자 발을 동동구르고 애통하여 하산 아랫마을에 가서 목격하였던 참상을 말하고 사라지니 얼마후 동리문하생들이 시신이 있는 곳에 그대로 흙만 덮어 건평을 하였다. 그후 백성들은 갖은 고난과 고초를 겪으면서 7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보내고 전쟁이 종식하게 되니 의주에서 환궁하신 선조대왕은 율곡선생의 부인이 선생묘소에서 자살하였다는 사연을 알게되자 그의 갸륵한 열정에 감동 열녀문을 하사하고 율곡선생 묘소 용미 그 자리에 봉분을 하라 하명하자 문하생들이 몰려와 치장하였다 한다. 

질문[전설] 두만리(斗滿里)에 얽힌 전설

 황보인(皇甫仁) 정승은 광탄면 두만리 신기동 만장산(滿丈山)의 정기를 타고 태어 나 생장한 것으로 유래되고 있다. 이 분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능과 학덕이 풍부 하였으며 효행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려한 기풍으로 김종서와 함께 육진 (六鎭)을 개척 영의정으로 단종대왕을 보좌하였다가 수양대군에게 3대에 걸쳐 5 명이 참화를 당한 애국충절이시다. 이 분이 고향인 신기동에 계실 때 두만리라는 명칭을 지은 것으로 추측되며 두자(斗字)는 이십팔숙(二十八宿) 중에서 만자(滿 字)는 이십지신(二十支神)에서 발취 후덕하고 풍요로운 부락이란 뜻에서 이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부락에서는 현재 덕수이씨와 밀양박씨들이 세거하고 있다. 옛날 가세가 빈곤하여 각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옹기장사로 연명을 하던 박 경달(朴慶達:밀양박씨 시조 박혁거세 56대손 박래양의 6대조)이란 사람이 있었는 데 어느 날 의주로 가는 국도변 새실막부락 아래 장승박이가 있는 지역에서 옹기 짐을 내려놓고 쉬며 혼자말로 신세타령을 하는데 노승 둘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 이 광탄천 냇가에 있는 큰 연못을 바라보며 그 곳 연화부수형에 집을 짓고 살면 10 년 안에 천석은 할텐데 하고 한 중이 입을 여니 또 한 중이 이런 이야기는 왜 하느 냐고 반문하면서 어서 가자고 재촉하며 걸어가는지라 이때 하도 괴상하게 여긴 옹기장수는 급히 달려가 앞을 막으며 큰절을 하고 지금 말씀한 것이 사실입니까? 하고 물으니, “글쎄”하며 갔다. 재차 쫓아가서 끈질기게 졸라대니 마지 못해 “꼭 부자가 되고 싶으냐”하며 하는 말이 “그럼 저기 연못가 아무 곳에나 움막을 짓고 살도록 하여라”하고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니 이상하게 생각한 나머지 즉시 산에 서 나무와 갈대를 베어 움막을 짓고 가솔을 데리고 무지공천 개울 연못가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추운 동절이 다가오니 월동준비에 급급한 나머지 신기동에서 당 시 백석을 하는 부자 이일진(李一鎭)댁 (덕수이씨 시조 이돈수의 19대손, 이창영 (李昌永)의 6대조)에 달려가 애원하며 잡곡 한 섬을 염치 불구하고 대여하여 줄 것 을 요청하니 인심이 너무나 후덕한지라 별로 알지 못한 처지임에도 선뜻 베풀어 주어 백배사례 후 짊어지고 오면서 생각하니 유난히 무거워 여러 번을 쉬며 집으 로 돌아왔다. 하도 궁금하여 섬을 끌러보니 잡곡 속에 큰 구렁이가 들어있었다, 깜 짝 놀라 주춤대다가 가슴이 설레이는 가운데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 나와 움막 뒤 에 서리고 있어 정신을 가다듬고 이것이 우리 집을 도울 복구렁이가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두툼하게 주저리를 틀어 덮어 주었다. 그 후 또 양식이 떨어져 이부자댁 을 다시 찾아 감사하다는 치하를 드린 후 잡곡 한 섬을 더 줄 것을 요청하니 또한 쾌히 승낙 월동을 무난히 넘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듬해 봄철을 맞아 옹기장사 를 하는데 어쩐일인지 하루에도 몇 짐씩 팔게 되어 빌려온 잡곡 두 섬과 장리조로 한 섬을 더하여 세 섬을 가지고 가서 예를 올리며 이생원께서 우리 식솔을 살려주 신 은인이라며 감사에 치하를 드리니 무슨 소리냐며 잡곡 한 섬을 도로 가져가라 하는지라 그렇지 않다며 우리 가족을 살려주신 은인이신데 모처럼 저의 정성을 저버리지 말라고 간청하니 듣지 않아 할 수 없이 도로 가지고 온 후 무슨 일이 있 으면 내 집 모양으로 드나들며 일을 살펴주게 되었다. 이리하여 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 옹기장수는 천석군이 대부자가 되었으나 이부자댁에는 시름시름 어려워지 자 집을 같이 짓고 잘 살았다는 전설로서 후손들이 창만 1리(두만동)와, 2리(신기 동)에 각각 수 십 호씩 쌓고 있으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한다. 

질문[전설] 용상사(龍床寺)에 얽힌 전설

고려현종 1년 10월 이부상서 겸 참지정사 강조(吏部尙書 兼 參知政事 康兆)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하여 30만대군을 이끌고 통진 선천에 나아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거란의 임금 성종(聖宗)은 끝내 야욕을 품고 11월16일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 의주를 함락시킨 후, ‘지금 대군으로 쳐들어 온 것은 강조가 옛 고려 임금 제7대 목종(穆宗)을 죽이고 새 임금을 세운 것을 물으려는 것이니, 강조를 보내면 회군할 것이나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개경으로 쳐들어가 너의 처자까지 죽일 것이며, 또한 비단옷과 은그릇을 성중으로 가지고 나와 항복하라’는 등 서신을 보내 우리 장병들의 마음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강조는 3부로 나누어 거란군과 대진, 수차에 걸쳐 격전 끝에 우리 군사는 대패를 거듭하여 30만명이나 희생되었다. 강감찬 장군(姜邯贊 將軍)이 현종을 남쪽으로 피신케 하니 할 수 없이 천정구현(泉井口縣-교하) 청사가 있는 월롱산으로 임시 은신하였다가 양주를 거쳐 청주로 내려가 체류하였다.   그러한 동안 거란의 임금은 사로잡혀 묶여간 강조를 보고 '너를 풀어주면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물으니, '나는 고려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하였다. 끝내 허락을 아니하매 거기서 피살되고 말았다. 거란군 20만 대군은 의기양양 진격을 하여 12월 6일 청천강을 건너 서경을 지나 개경에 들어와 선봉장 사진분노(先鋒將 邪律盆奴)가 현종이 있는 곳을 물으니 하공신(河拱辰) 등이 강남으로 향하였다고 하자 강남의 거리를 물으매 몇 수만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선봉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옳게 듣고 돌아가 버린 후 현종 2년 1월 1일 거란의 임금이 개경에 들어와 보니 종묘와 궁궐 민가뿐만 아니라 문화재는 거의 불타버린 것을 보고 1월 3일 하공신 등이 철군할 것을 간청하니, 거란의 임금이 허락하고 1월 11일 회군하였다.   그리하여 1월 23일 현종은 이 소식을 듣고 환경하여 4월 22일 공부랑중 왕첨(工部郞中 王瞻)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한 것을 사례하고, 자주 사신을 보내 화평을 유지하는데 노력하였다. 관하 월롱면 덕은리 산117번지 소재에 있는 용상사는 고려 목종(穆宗)이 후계자가 없게 되자 현종9년(1018) 목종의 어머니(경종왕비) 현애왕후와 외숙 김치양(金致陽)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왕위로 삼으려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서경도순검사 강조(康兆)가 김치양 일족을 사살 후 목종이 충주로 가는 도중 적성에서 살해시키고, 대량군 순(楯)을 제8대 왕으로 추봉하니 거란족은 이 틈을 타서 2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입하게 되자 현종은 민복차림으로 이곳 월롱산에 도피 은신하다 환도하였다.   그 후 강감찬장군(姜邯瓚將軍)이 구주대첩(龜州大捷)에서 승전하고, 국내가 평정되자 현종은 난시에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된 이곳 월롱산을 잊을 수 없어 이곳에 암자(庵子)를 건립하였는데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용상사(龍床寺)라 명칭이 붙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후 조선조 세종 27년(1445)에 덕은화주(德隱化主)가 중건하였으며, 이 때 석불좌상(높이 61cm, 폭 50cm)을 조성해 봉안하였는데, 「正統十年 乙丑五月 ○○德隱」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의 용상사는 1940년 4월10일(일제시) 석파(石破)스님이 원래 있던 곳에서 약간 아래쪽에 터를 닦아 절을 중건하였는데, 이 때 벽장굴에 안치해오던 석불좌상을 대웅전에 봉안하였다. 1967년 대웅전을 중수하고 서쪽에 삼신각(三神閣)을 신축하여 내려오다 문두(文斗)스님에게 이어 내려오면서 대한불교 일승종(一乘宗)에 소속하게 되었다. (문화유적총관 1977, 파주군지 中 1995)  

질문[전설] 진대밖이에 얽힌 전설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대륙에 침략을 성취 하기 위하여 25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왜 군들은 진격을 거듭 대전을 거쳐 음력 5월 2일 순식간에 한양을 함락시키는 동안 선조대왕은 몽진을 서둘러 4월 29일 깜깜한 절벽 폭우가 쏟아지는 그믐밤 임진강 을 건너 의주로 파천하게 되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왜군들은 5월 2일 임진강변에 이르러 15일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 끝에 왜군이 승전을 거듭 진격하 여 송도를 거쳐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동시 전역에 걸쳐 침략을 받게 되니 할 수 없 이 12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 이여송(李如松)제독이 이끄는 20만의 대군이 들어 와 선조 26년 1월 8일 평양성을 탈환하고 진격하니 황해도 봉산, 백천, 개성에 주 둔한 왜군들까지 한성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여송(李如松)제독이 이끄는 명군 들은 광탄면 용미리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당시 왜군들은 한양으로 전부집결 군 사를 정돈, 정비하는 한편 벽제관으로 쳐들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승장처영(僧 將處英)이 이끄는 승병들과 아울러 치열한 격투를 벌였으나 명의 수만 희생자를 내게 되자 고령산 전역에 걸쳐 시체가 늘비하였다 하며 신음소리와 함께 피바다 를 이루어 하늘을 진동시켰다 한다. 이 전투에서 이여송제독의 아우 이여백(李如 伯)과 이여매(李如梅)가 전사하니 이여송제독은 비참한 슬픔 속에 평양성으로 명 군을 이끌고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상징하기 위하여 그 후 주민들은 그 당시에 진대를 그 자리에 세워놓고 동리명을 진대밖이라 호칭하는 한편 400여년 이 지난 오늘까지 수호·보존하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전설] 옥돌내 참게(蟹)의 전설

옛날부터 임진강변에서 번식하고 있는 참게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산품으로 크고 맛이 있어서 전국적으로 파주게라면 유명하였다. 특히 옥돌내(지금의 월롱면 위전리 냇가)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게의 본고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전에는 주로 샛개울이나 논에서도 임진강에서 부화한 새끼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잡았으나 지금은 농약으로 인하여 강가에서만 잡히는 정도이며 문명의 발달과 의학상식의 발달로 기생충이 무서워 별로 먹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에 홍역 유행 시 가재의 생즙을 먹이는 습관이 있어서 많은 어린이에게 간디스토마가 유행 또는 잠재했었다고 한다. 간략하게 의학상으로 병이 옮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폐디스토마의 충란이 가래(담)을 통해서 외계(外界)나 대변에 섞여서 나온 다음 물 속에 떨어지게 되면 “마라시륨”이라는 새끼벌레로 부화되어 헤엄쳐 다니다가 제1중간 숙주(宿主)인 대사리속에 들어가 자라서 꼬리가 달린 “셀카리아”로 변하여 이것이 게나 인체의 피부 또는 어류내장에 들어 있는 것을 사람이 먹음으로서 옮게 되는 것이다. 해방전만해도 게 한마리면 밥 한그릇을 맛있게 먹고 게 딱지 속에 밥을 넣어 맛있게 후벼파서 먹은 후 게다리를 잘근잘근 씹어먹던 그 “맛”의 옛 향취는 영영 없어지고 말았단 말인가? 그러나 디스토마에 걸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게를 끓는 물에 넣으면 그 안에 있는 포낭유충이 수분내에 죽게 되며 게장을 만들면 그 안에 있는 포낭유충이 7일내지 10일이면 사멸한다. 그러므로 게장을 담글때는 우선 간장에 게를 담근 후 약 20분 끓인 후 밀봉해 두었다가 최소한도 1주일이 지난 다음에 꺼내 먹어야 하며 오래 묵을수록 진귀한 맛이 난다. 그리고 만약에 디스토마에 감염되어도 요즘은 “비천” 또는 “비치늘”이라는 특효약이 있어 한달만 복용하면 깨끗이 나을 수 있다. 옛날 임금님이 맛있게 구중궁궐에서 혼자 자시던 파주 게를 우리 현대인은 디스토마에 걸리지 않고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 그 얼마나 파주의 자랑이랴. 옛날 중국 산동성 청주사람 사공요(史公繇)가 명나라 개국공신 예부상서로 있을당시 소인들의 모함을 받아 명나라 태조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 공민왕때 우리 나라로 망명 귀화하여 월롱면 덕은리에서 살다 죽으니 중국에서 옥돌비를 천자가 하사하여 세웠으나 우리 나라가 혼란할때 자손들이 집앞 개울에 넣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후 옥돌을 내버린 개울이라하여 옥돌내로 명칭이 붙여진 이 옥돌내 개울은 매년 봄이면 황해바다에서 어린 참게가 임진강을 타고 올라와 광탄 여울을 지나 소령원이 있는 영장리까지 오르내리는 동안 모래와 자갈밭을 헤매다보니 참게다리에 털이 전부 없어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질문[전설] 처사바위(處士岩)에 얽힌 전설

광탄면 마장리 박달산 동맥산록에 귀암절벽이 있는데 이곳에는 마당같은 큰 바위 가 있으며 그 아래 고령산에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 물 속이 들여다 보이는 서너길 가량에 웅덩이 연못이 있었다. 이러한 경관이 아름다운 이 곳 마당에서 성 종대왕의 5남 완원군의 9대손 되는 이건섭(李建燮)선생은 벼슬을 마다하고 공부 만을 전념하는 동안 이 연못에서 목욕을 자주하면서 책과 더불어 벗을 삼았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 학문이 전진되어 유명한 산중처사 학자로 소문이 자자하게 되자 인근 유생이 많이 몰려들어 집에서 훈학을 하는 한편 조선조말엽 교하향교 훈도로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처사가 공부 하던 바위를 가르켜 처사바위 또는 그 아래 연못을 처사탕이라고 오늘날까지 전 설로 내려오고 있으나 현재 연못은 전부 매몰되어 얕은 시냇물만이 흐르고 있는 상태로 변모되었다. 

질문[전설] 눌노리(訥老里)의 유래의 전설

 삼한강역고(三韓彊域考)에 의하면 파평면 눌노리 이 지역은 삼한시대(辰韓·馬韓·弁韓)에 마한의 영역권에 있었으며 당시 52지국중 고리국(古離國)의 고궁터로써 궁궐이 있던 곳은 궁갓, 감옥이 있던 곳은 옥담밭 등으로 지금까지 불려 내려오고 있다. 고구려 개창후에는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조에 영평현(鈴平縣),파평현(坡平縣) 등의 고을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조 개국 후 태조 2년(1398) 서원군과 파평현이 통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 되니 폐철하게 된 지역으로 윤관장군의 애첩 현웅녀(玄熊女)가 윤관장군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낙화암(落花岩)아래 수십길 되는 연못에서 투신자살하게 되자 그 후 이 연못을 웅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부락을 웅담리로 명칭하게 되었다. 이 맑은 물이 샘내를 거쳐 눌노천을 연하여 소개울(牛津)이 임진강으로 합류되는 유서 깊은 고장이며 「오랫동안 고을이 머물러 있었다」하여 눌노리라고 명칭이 붙어졌다 한다. 파평산 서북맥 내령 끝머리 용연에서 파평윤시 시조 윤신달(尹莘達)이 탄생하여 고려 개국공신으로 활약을 하였으며 그의 손자 윤금강(尹金剛)스님은 파평산상에 금강사(金剛寺)를 건립 시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기도 추모하였으며 지금은 미타사로 개칭 16나한전에 모셔져 있다. 또한 서기 1198년 최충헌, 최충수 형제간에 정치다툼으로 아우 최충수를 죽인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고손 윤관장군은 서기 1107년(예종 2)에 도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 9개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였던 무서운 장수로서 파평산상에서 윤신달이 소시절 군마훈련을 하였다는 치마대(馳馬台)가 있다.조광조의 문인인 청송(成守琛 )선생은 중종 9년(1514) 22세 당시 부친상으로 당하여 파주 향양리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아우 절효(成字琮)와 같이 하였으며 아우 성수영이 적성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중종 39년(1544) 9월에 처가가 있는 우계연변에 집을 짓고 죽우당(竹雨堂)이라하고 지금 파산서원터에서 훈학을 하면서 파산청은(坡山淸隱) 도는 우계한민(牛溪閒民)이라는 자호를 가졌으며 여러 벼슬을 하명하여도 모두 사은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 명성이 높아 사방의 명사들이 그의 집을 찾았으나 겸손하였다 한다. 사후 문정의 시호와 우의정에 증직된 후 율곡선생의 주선으로 청송서원(廳松書院)을 건립 후 파산서원(坡山書院)으로 개칭 사액(賜額)을 받았다. 인조6년(1628)에 우계(成渾)선생은 좌참찬에 비국당상을 겸하여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유명한 학자로서 파산서당에서 64세로 돌아가시니 문간공의 시호와 좌의정에 증직 숙종 8년(1682)에 율곡선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이시다. 이러한 파산서원은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 이어 전국적으로 세번째 건립된 유일한 서원으로 조선조 말엽 고종때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여운영 조소항 등 고명한 정치가를 조현규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지도 배출하였던 유일한 서원이다. 또한 휴암선생의 사위 옥천(趙堪)과 옥천의 사위이며 우계선생의 아들 창랑(成文瑢), 창랑의 사위 화당을 모신 경현단(景賢壇)이 우측에 있어 매년 음력 2월 중정일에 파산서원과 병행 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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