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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광해군이 이름 하사한 의로운 말의 무덤 스토리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 ‘의마총(義馬塚)’이 있는 연안 이씨 종중 묘역. 길가와 주변 지역에는 어디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안내 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말의 무덤은 돌만 조금 보일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 전익진 기자

[출처: 중앙일보] [르포]광해군이 이름 하사한 의로운 말의 무덤 스토리

지난 6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183번지. 파주시 광탄면과 양주시 광적면을 잇는 발랑저수지 인근 360번 지방도 변이다. 연안 이씨 종중의 묘역이 왕복 2차로 도로변에 있다.
   

임금이 이름을 하사한 400년전 말 무덤 의마총(義馬塚)
광해군때 이유길 장군의 전사 1000㎞ 달려 전한 뒤 죽어

연안 이씨 중중 묘역내 한켠에 훼손된 채 방치
안내간판 조차 없고…지역 주민도 대부분 몰라

지역 문화계ㆍ주민 등, “원형 복원ㆍ보존 필요”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며 후대 전해야” 

종중 묘역엔 잊히다시피 한 역사의 현장이 포함돼 있다.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이다. 하지만 길가와 주변 지역 어디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역 주민 가운데도 의마총의 소재를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 길가와 주변 지역에는 어디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그 흔한 안내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말의 무덤은 돌만 조금 보일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 오른쪽 위로 말의 주인인 이유길 장군의 묘가 보인다. 전익진 기자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 길가와 주변 지역에는 어디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그 흔한 안내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말의 무덤은 돌만 조금 보일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 오른쪽 위로 말의 주인인 이유길 장군의 묘가 보인다. 전익진 기자

 
가까이 가서 살펴본 의마총의 보존 상태도 형편없었다. 돌을 3단으로 쌓아 올려 만들었던 돌무덤은 흔적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흙에 파묻혀 있고, 돌 윗부분만 땅 위에 드러나 있었다. ‘義馬塚’이라 쓴 비석과 연안 이씨 종중이 설치한 돌로 만든 표지석을 보고서야 이곳이 의로운 말의 무덤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의로운 말의 무덤’이란 뜻의 ‘의마총’ 이름은 조선 시대 왕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유일한 말 무덤이다. 이 무덤은 자신이 태우던 장군이 전장에서 죽음을 앞두고 집으로 돌려보내자 사흘 동안 달려 장군의 집에 도달해서는 장군의 죽음을 알리고 숨이 끊어진 충성스러운 말이 잠든 곳이자, 이 말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 길가와 주변 지역에는 어디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그 흔한 안내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말의 무덤은 돌만 조금 보일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 전익진 기자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 길가와 주변 지역에는 어디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그 흔한 안내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말의 무덤은 돌만 조금 보일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 전익진 기자

 
이 말의 주인은 이유길(1576∼1619) 장군이다. 본관이 연안인 이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을 따라 19세에 출정하며 무인(군인)의 길을 길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9품직을 제수받았다.  
 
그는 이후 1619년 도원수 강홍립의 부장으로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됐다. 명나라는 과거 만주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세운 뒤 대륙으로의 확장을 꾀하며 공격을 해오자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던 것.  

의마총 위치도. [파주시]

의마총 위치도. [파주시]

 
당시 1만3000명의 조선 원군이 파견됐지만, 1619년 심하(深河, 지금의 중국 심양 지역)의 후차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대부분 전사했다. 이 전투를 지휘했던 이유길 장군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이 장군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 죽음을 알리는 ‘(음력)3월 4일 죽다’라는 뜻의 글 다섯 자 ‘3월4일사(三月四日死)’를 자신의 삼베적삼 옷자락에 핏물로 적어 말의 안장에 매어 주고선 말을 채찍질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 길가와 주변 지역에는 어디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그 흔한 안내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말의 무덤은 돌만 조금 보일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 전익진 기자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 길가와 주변 지역에는 어디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그 흔한 안내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말의 무덤은 돌만 조금 보일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 전익진 기자

 
이 장군의 말은 압록강을 지나고 산을 넘어 1000㎞ 정도 거리를 사흘 만에 달려 현재 의마총이 있는 이 장군의 집으로 돌아왔다. 장군의 말은 몸에 매단 옷자락의 글을 통해 장군의 전사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고는 슬피 울다 쓰러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 광해군(1575∼1641)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1621년 이유길 장군에게 병조참판 직을 내렸고, 말의 무덤을 의마총이라 부르게 했다. 이유길 장군의 무덤도 의마총 옆에 함께 조성돼 있다. 말은 돌아와 땅에 묻혔지만, 이 장군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어 가묘로 조성돼 있다. 이 장군은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아 200여 년 후인 1829년(순조 29년)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 옆에 조성된 말의 주인인 이유길 장군의 묘. 전익진 기자

약 400년 전 조성된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의마총(義馬塚) 옆에 조성된 말의 주인인 이유길 장군의 묘. 전익진 기자

 
현재 묘역 옆에는 연안 이씨 청연공파의 종손 이봉규(74)씨가 살며 묘역과 의마총을 관리하고 있다. 이씨는 “어쩌다 물어물어 의마총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있긴 하지만, 의마총이 제모습을 잃어버리면서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자 한없이 충직하고 의로웠던 말의 이야기가 잊히지는 않을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유길 장군의 활약과 교지 등이 담긴 ‘연안 이씨 이유길 가전 고문서’는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돼 있다.
 
이와 관련, 지역 문화계와 주민·연안 이씨 종중 등은 의마총의 원형을 조속히 복원하고 기념물로 지정해 사라져가고 잊혀가는 역사의 현장을 살려야 한다고 최근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호재(73) 연안 이씨 수도권 종친회장은 “전설 속에서나 나옴 직한 의로운 말의 이야기와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잘 복원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마을 이치선(60) 이장은 “잊혀 가는 의마총이 복원돼 많은 이들이 찾아 소중한 역사와 의로운 말의 이야기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되살아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용근 파주문화원장은 “지역의 중요한 문화유산인 ‘의마총’이 체계적으로 보존되고, 후대의 역사자료로 남을 수 있도록 현장 조사를 한 뒤 관계 기관과 합리적인 보존 방안을 협의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파주=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관리자 DATE   2017-11-13 11: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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