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역사

테마기행 파주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문향 파주에서

통일 조국을 열어가는 통일한국의 중심도시로 발전해나가는 파주!

선사유적지 순례

파주지역의 선사유적지(교하 다율, 당하리 고인돌 및 월롱 덕은리 고인돌)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순례하며 고인돌과 구석기 문화재에 대해 알아본다.

1. 고인돌이란?

고인돌은 괸돌,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석봉(石棚), 영어로는 Dolmen이라고 한다.


지석묘라는 용어는 그 한자의 뜻처럼 돌로 고여놓은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 방위에 커다란 돌을 덮어놓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때로는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그 예로 덮개돌에 뚫린 구멍(성혈,星穴)이나 그림 같은 것을 보면 신앙적 대상물로 여겼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런 커다란 돌유물들은 인류의 거석(巨石)문화의 일종으로 큰 돌에 신비로운 힘과 인간의 길흉화복이 좌우될 수도 있는 정령이 들어 있다는 인식하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거석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 또는 거석을 숭배하는 것을 만물숭배신앙(Animism)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거석문화로는 선돌(石)과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 고인돌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고인돌을 보면 어른 남자, 여자의 것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어 권력을 가진 자나 족장의 무덤만이 아니라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고인돌 무덤에 묻힐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현상은 고인돌 사회 후기로 갈수록 더욱 일반화 되었는데 다양한 크기와 형식을 가진 고인돌들이 무더기로 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현상은 이를 뒷받침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무덤속에서 발견되는 돌화살촉, 돌검 등의 석기나 장신구, 토기등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짐작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즉 고인돌은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당시 사회의 역동성, 규모나 생활을 짐작해보고 아울러 끊임없이 선사시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하는 귀중한 유적이다.

2. 고인돌의 기원과 분포

* 고인돌은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고 그 축조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에 대한 조성시기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데 신석기시대로 추정하는 것은 고인돌 주변에서 나온 뗀석기, 빗살무늬토기 조각들로 미루어 짐작하는 경우이고 청동기 시대라는 주장은 다시 기원전 2,000년대 말, 1,000년대 초기, 1,000년대 중기 등 세가지의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기원전 1,0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자연환경 조건에 막대한 영향을 받으며 살았다. 따라서 영원불멸하는 자연물 중 돌을 숭배하고 신앙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이용해 기념물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특히 시체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그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활동할 수 없게끔 한다는 의미로 시체를 매장한 뒤 큰 돌로 덮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인돌이다.


*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은?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은 북방기원설, 남방기원설, 독자발생설의 3가지 설이 있다.

북방기원설은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다른 청동기 문화와 더불어 북쪽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견해이다. 대표적 청동기 문화유적인 고인돌이 바로 북방(요녕지방)의 돌널무덤에서 발전했다고 보고 돌무덤 뚜껑이 커지면서 개석식 고인돌이 되고 무덤이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북방식 고인돌이 되었다는 설이다.

남방기원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바다를 건너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쌀농사와 더불어 다른 제반 문화가 청동기 시대를 전후하여 전해지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에서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등 서해안을 따라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며 남방문화의 요소인 난생설화와 고인돌의 분포지역이 일치한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독자발생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주변지역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자체에서 발생되었다라는 견해이다. 그 이유로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가장 밀집되어 있고 형식도 다양하며 주변의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들고 있다. 세 가지 설이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고인돌에서 비파형 동검같은 북방문화의 유물이 나오기도 하고 농경문화의 유물등 남방문화 관련유물이 발견되기도 한다는 점이며 어쩌면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남.북방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고인돌 문화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 고인돌은 주로 어디에 있나?

세계적으로는 북유럽과 서유럽, 영국, 스위스, 지중해 연안, 중동지방과 북아프리카 등에도 분포되어 있고 아시아 지역에는 남부 인도, 자바, 인도네시아, 필리핀, 오키나와, 일본 북구주, 화중지방에서 산둥반도에 이르는 중국 해안지방과 요동반도 지방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함경북도 지방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세계 고인돌 분포지역 중 가장 밀집되어 분포하는 곳이 우리나라이고 특히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들은 높은 산의 중턱이나 기슭에 위치하는 것도 있으나 주로 해안가나 강가 혹은 그 옆 구릉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많다.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는 경우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늘어서 있는데 주로 산능선이나 골짜기 방향, 물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어 물과 같이 영생하라는 그 시대의 자연관 내세관을 엿 볼 수 있다.

가장 많은 고인돌을 가진 전북지방은 평야지대와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전북 고창군의 경우 천여기가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전북 고창, 부인, 김제, 군산, 정읍, 남원, 장수, 무주 등에서 발견되는 고인돌들은 수십기에서 수백기에 이르는 고인돌 군락을 이루고 있고 그 형식도 여러 형식을 두루 갖추고 있다.


3.고인돌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 거대한 돌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 고인돌에 쓰인 거대한 돌은 근처 야산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바위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한 경우도 있고 거대한 바위를 쪼개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돌을 쪼개 낼 때는 먼저 바위틈에 나무쐐기를 박아 나무에 물을 붓고 나무가 물에 불을 때까지 기다린다. 오랫동안 그렇게 두면 나무가 팽창하면서 돌에 서서히 금이 가고 결국은 쪼개짐이 일어난다.


* 돌을 어떻게 이동하였는가? 거대한 돌을 이동하는데에는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밧줄과 지렛대 등을 이용하여 끌고 당기면서 이동했는데 이때 돌 아래에 통나무를 깔고 굴려가는 방법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어떻게 들어 올렸나? 거대한 뚜껑돌을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구덩이를 파고 굄돌을 세운 후 그 주변에 흙을 돋아 커다란 언덕을 만들고 그 언덕을 이용해 통나무를 굴려가며 덮개돌을 올린 후 다시 쌓았던 흙을 걷어내는 방법이 이용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석식이나 바둑판식의 경우는 먼저 땅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는다.

1. 채취한 돌을 운반
2. 구덩이를 파고 굄돌(관석)을 세움
3. 주변에 굄돌높이의 흙을 쌓는다
4. 덮개돌을 운반하여 올림
5. 돌을 올리고 쌓았던 흙을 치움
6. 굄돌 사이에 막음돌을 세움. 완성


4. 고인돌의 형식(종류)


고인돌의 형식은 북방식, 남방식으로 구분되어 왔으나 북방식 지석묘가 한반도 남부인 장수와 고창지역에서 발견되고 북한과 요동반도에서 수많은 남방식 고인돌이 보고되면서부터는 일반적으로 그 형식의 분류를 고인돌의 모양을 근거로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 탁자식(북방식)고인돌 탁자식 고인돌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인돌의 모습으로 모양이 탁자와 같이 생긴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꺼운 판석을 마주 세우고 나머지 두면에 막음돌을 세워 네모꼴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 놓은 것으로 네모난 무덤방이 지상에 만들어진 모양이다. 덮개의 크기는 대개 2-4미터 정도이고 8미터 이상인 것도 있으며 높이는 소형에서부터 2미터 이상되는 것도 발견되고 있다. 지상의 무덤방 모양은 ᄆ자 ᄑ자와 같이 막힌 모양이거나 이후 어울무덤(함께 계속 사용)이 되면서 한쪽 막음돌을 없애기도 하고 낮은 턱을 만들기도 했는데 탁자식의 경우 일찍부터 도굴을 당하거나 파괴되어 막음돌 없이 =자 평면이 된 경우가 많다. 주로 강화도 부근리와 파주 덕은리, 황해도 은율 및 평남등지에 분포한다.

* 바둑판식(남방식) 고인돌 탁자식 고인돌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인돌의 모습으로 모양이 탁자와 같이 생긴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꺼운 판석을 마주 세우고 나머지 두면에 막음돌을 세워 네모꼴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 놓은 것으로 네모난 무덤방이 지상에 만들어진 모양이다. 덮개의 크기는 대개 2-4미터 정도이고 8미터 이상인 것도 있으며 높이는 소형에서부터 2미터 이상되는 것도 발견되고 있다. 지상의 무덤방 모양은 ᄆ자 ᄑ자와 같이 막힌 모양이거나 이후 어울무덤(함께 계속 사용)이 되면서 한쪽 막음돌을 없애기도 하고 낮은 턱을 만들기도 했는데 탁자식의 경우 일찍부터 도굴을 당하거나 파괴되어 막음돌 없이 =자 평면이 된 경우가 많다. 주로 강화도 부근리와 파주 덕은리, 황해도 은율 및 평남등지에 분포한다.

*개석식(式) 고인돌 바둑판식은 탁자식과 반대로 땅속에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지상에 둥글거나 위가 뾰족한 서너개의 받침돌을 둔 뒤 거대한 덮개돌을 얹은 것으로 그 모양이 바둑판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둑판식 고인돌은 점차 무덤방이 따로 없이 여러 무덤이 모여있는 묘역의 중심에 묘표로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덮개돌의 크기는 60-80톤이 넘는 초대형에서 소형까지 다양하게 나타나며 탁자식 고인돌처럼 전체 높이에 따라 사람 키를 넘어서는 것부터 작은 것까지 다양하다. 주로 전라도, 경상도 등 한강 이남지역에 분포한다.

개석식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고인돌로 땅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무덤방 뚜껑에서 커다란 돌만이 올려져 있는 고인돌을 말하며 지표면에는 굄돌이나 받침돌이 드러나지 않는다. 겉에 받침돌이 없다 하여 '무지석식' 혹은 '놓인 형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굄돌이나 받침돌이 없어 대부분 반쯤 땅속에 파묻혀 있어 자연석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으나 덮개돌의 가공상태와 주변 상황, 그리고 입지 조건이 여느 자연석과는 다르기에 고인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탁자식이나 바둑판식 고인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굴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된 우리나라 고인돌의 대표적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5. 고인돌의 부분 명칭


6. 파주의 고인돌

파주는 우리나라 고인돌 분포지 가운데 수도권 인근 지역 중 강화 고인돌 유적 다음가는 집단 고인돌 유적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월롱면 덕은리 고인돌은 고인돌 주변에서 청동기 시대의 대형 움집터가 발견되었는데 이처럼 크고 완벽에 가까운 수혈식 주거지가 발견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유적이다.

파주의 고인돌 분포 양상은 주로 임진강 연안을 끼고 있는 산사면이나 낮은 구릉지를 끼고 분포하는데 특히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지역은 다율리, 당하리, 교하리, 상지석리, 하지석리, 산남리 등이 고인돌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며, 월롱면 덕은리의 고인돌과 진동면 초리 등 임진강 연안 지역에 밀집되어 나타나고 있다.


* 교하 다율, 당하리 고인돌 교하읍 교하중학교 인근 다율리와 당하리, 교하리가 인접한 구릉지대에 약 100여기의 고인돌이 집중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군사시설 및 산림훼손으로 인해 대부분의 고인돌이 파괴 또는 훼손되었으며 20여기만이 그 원형을 확인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6기가 경기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조사 당시 이미 훼손이 심해 하부구조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으나 탁자식 고인돌로 추정되며 고인돌 주변에서 작은 토기 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집터가 발굴되었는데 집터는 네모꼴의 움집으로 현재 일부의 고인돌은 경기도청, 통일로, 온양민속박물관 등에 이전 복원되어 있으며 발굴 당시 고인돌 대부분이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당하리 고인돌은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동기 12.5미터, 너비 4미터, 깊이 40-80m의 크기이다. 집터 안에서는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간돌검,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으며 집터 안쪽에 화덕자리 두 군데가 발견되어 이곳이 선사인들의 생활 주거지였음이 확인되었다.

* 월롱 덕은리 고인돌 덕은리 고인돌은 임진강 지류인 문산천의 서안에 이어진 높이 82미터의 구릉지대에 능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는 소규모 탁자형(북방식) 고인돌이다. 구릉의 하단부분에서 서북쪽으로 구릉 최고점에 이르기까지 능선마다 1-2개씩의 소형 지석묘들이 흩어져 있으며 가장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30미터 되는 지점에 가장 큰 규모의 지석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남쪽 사면에 걸쳐 약 10여기의 지석묘들이 분포하고 있어 가장 큰 규모의 고인돌이 이 유적의 중심이 되고 있다.

약 20여기가 넘는 이곳의 고인돌들은 발견 당시 대부분이 무너져 땅에 묻혀 있었으며 학술조사 이후 그 중 몇기를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덕은리 고인돌은 수도권 인근 고인돌 유적으로는 강화 고인돌에 이어 두 번째 규모이며 이 곳의 고인돌은 모두 탁자형(북방식) 지석묘로 이루어져 있다.

1963년-65년에 걸쳐 실시된 이곳의 지석묘 발굴 조사 과정에서 청동기 시대의 대형 움집터(竪穴式住居址)가 발견되었는데 그 규모가 동서길이 15.7미터, 남북너비 3.7미터 깊이 40-90cm의 길쭉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벽면에는 붉게 탄 흔적과 4면의 벽선을 따라 바닥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 중앙 동편에 2개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이들과 함께 숯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이주거지의 연대가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하는 시기의 유적임이 밝혀졌다. 현재 국가사적 제1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인돌과 지명 교하읍 상지석리(上支石里), 하지석리(下支石里) 본래 교하군 지석면 지역으로 고인돌이 두 곳에 있는데 고인돌을 중심으로 위쪽 마을을 상지석리 아래 마을을 하지석리라고 명명하였다. 현재는 상지석1리에 고인돌이 있는데 이 마을의 자연마을명은 괸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