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문화재

황희선생 묘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34호
지정연월일 :
1976년 8월 27일
소재지 :
탄현면 금승리 산 1
소유자 :
장수황씨 대종중
조성시기 :
조선 전기 문종 2년(1452)
규모 :
재료 :

문화재 설명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이자 청백리로 칭송받는 황희의 묘이다.
황희의 어릴 때 이름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황희는 스물일곱 살 때 고려가 시행한 과거에 급제하여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 학생의 훈육과 학습 활동을 감독하는 성균관 학록學錄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황희는 두문동에 은거했는데, 조선의 관료와 동료의 추천으로 성균관 학관學官과 세자 우정자右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태종 때에는 6조 판서를 고루 지냈으며, 세종 때에는 여러 관직을 거쳐 최고 직위인 영의정에 올랐다. 특히 황희는 18년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외교 관계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총감독하며 세종을 도왔다.
황희의 묘역은 3단으로 넓게 만들어졌고 봉분도 크다. 황희의 봉분은 묘 앞에 화강암으로 ㄷ자 모양의 3단 호석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그 앞으로 2개의 화창火窓이 뚫린 장명등이 있다. 봉분 왼쪽에 묘비가 있으며 좌우 양 옆으로 동자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다. 묘역 아래에는 1505년(연산군 11)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신숙주가 글을 짓고 안침이 글을 썼다. 현재 신도비의 비문은 너무 닳아서 거의 읽을 수 없으며, 1945년 다시 세운 신도비와 함께 비각의 보호를 받고 있다.